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개막한 2014년 SeMA Blue 展은 〈오작동 라이브러리 Malfunction Library〉라는 제목으로 10명의 젊은 작가들 ― Bang & Lee, Sasa[44], 권죽희, 김경호, 김실비, 김아영, 김황, 이천표, 이행준 ― 이 참여했다. 전시를 기획한 박가희 큐레이터는 “비약적으로 전개된 정보화를 통해 정보와 지식에의 접근은 용이해졌지만 오히려 올바른 선택이 어려워진 지식정보사회의 현상에 주목”하면서, 전시를 통해 “이 사회에서 야기되는 문제들에 비평적 시선을 담아 표현한” 작가들과의 협업을 모색했다. 대개 이들은 직·간접적인 태도로, 최근 지식정보사회의 가속화 현상 속에서 소외되거나 버려지고, 왜곡되거나 과잉 축적되고, 통제되거나 일률적으로 학습되는 일련의 과정들에 주목하여 비공식적인 지식과 누락된 자료들을 재수집한다. 사실, 그렇게 구축된 ‘오작동 라이브러리’는 흥미롭게도 아주 잘 (오)작동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잘못 작동하고 있음”에 대한 분명한 정보를 전달하고 있으니 말이다.
세계화의 이슈가 전 지구적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의사소통과 정보전달에 대한 욕망은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다른 언어와 사회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지식정보를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로 하여금 ‘바벨의 도서관(La Bibliotheca de Babel)’을 상상케 했다. 세상의 모든 언어로 기록된 책들이 빠짐없이 소장된 바벨의 도서관은 상상의 도서관으로, 끊임없이 생산되는 무한한 지식의 정보가 인간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비밀스런 암호로 흩어져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작동 라이브러리〉는 혼돈스러운 바벨의 도서관을 다시 상상한다.
권죽희의 〈fromthebooktothespace〉(2013)는 우연히 지인으로부터 얻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Encyclopaedia Britannica)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근대 계몽주의 사상에 힘입어 “전 지구적으로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관점을 택하며, 체계적으로 그 지식과 정보를 조직한다는 원칙” 하에 1768년부터 출판된 이 백과사전 전집을 어느 대학도서관에서 쓸모가 다해 폐기처분 한다기에 가져왔다. 그는 그중 9권을 일일이 손으로 칼집 내어 자른 후 길게 이어 붙여서 체계적으로 조직되었던 지식과 정보를 뒤엉킨 암호처럼 단번에 실제의 공간 속에 흩어놓았다. 원래의 형태를 기억할 수조차 없이 헝클어진 백과사전은 역설적이게도 서로가 긴밀하게 연결된 ‘한 권의 책’을 표상하면서, 일시적으로나마 상상 속 ‘바벨의 도서관’을 눈앞에서 생생하게(livelily) 실현시켜 놓은 셈이다.
김황이 인터뷰 리서치를 통해 타인들과의 대화를 시도해 온 〈침묵의 방〉(2012~2014)은 사회 속 개인들과의 대화가 궁극적으로 세계에 대한 비평적 이해와 사유로 지속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함의한다. 그는 ‘예술 안에서의 사회적 활동’ 혹은 ‘사회적 활동을 통한 예술’이라는 다소 모호한 경계 속에서 각자의 신념을 갖고 살아가는 여섯 명을 만나 작가가 고민해왔던 ‘행동주의와 예술의 연대’에 대한 실제적인 해답을 모색한다. 김황은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인터뷰에 참여했던 여섯 명(맹봉학, 임성용, 조지은/믹스라이스, 장성진, 최서윤, 한받)과 함께 ‘인간 도서관(Human Library)’의 형식을 빌려 관객들과의 활발한 대화를 통해 ‘모두의’ 아카이브를 구축할 수 있는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 한편, 듀오 작가 Bang & Lee는 현대사회의 과도한 ‘투명성’에서 발생되는 지식과 정보에 대한 오류, 무질서, 변화와 생성 등으로 인해 혼란이 가중된 한 개인의 불안정한 서재를 리서치에 기반하여 설치했다. 어쩌면 그들의 〈투명한 스터디(Transparent Study)〉(2008~2014)는 학습된 다양한 부호와 이미지 목록들이 서로를 끊임없이 참조하고 모방하면서 의미를 지우거나 생성해냄으로써, 무질서한 지식의 총체인 ‘바벨의 도서관’을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김실비는 동서고금의 모든 문화와 지식 체계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 장소, 기호, 속담 등을 차용해 새롭게 조합하여 재배열하는 방식을 취한다. 작가는 비디오 게임 형식의 〈목석과 당나귀〉(2014)에서, 기존의 지식에 접근하는 진부한 규범들을 통렬하게 비하하면서(diss) 전형성에 위배되는 게임 방식을 제시한다. 게임에서 주인공 ‘목석(동양에서 나무와 돌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무디고 무뚝뚝한 인물을 비유. 전시 도록 참고)’은 ‘당나귀(말과科의 동물로 말보다 움직임이 느리고 작아서 아둔함과 추함의 대명사로 동서양의 속담과 문학에 자주 등장. 전시 도록 참고)’로 불리는 세 명의 적과 대결을 펼치게 된다. 예컨대 맹인 당나귀, 벙어리 당나귀, 암살자 당나귀로 등장한 이들은 각각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라”, “혁명은 필요하다”는 스스로에게 모순되면서도 진부한 선언을 목석에게 가르친다. 진부한 지식에 대한 깨달음은 그것에 대한 강한 적대를 통해 획득되는 게임의 아이템과도 비슷하다. 엉뚱한 지식의 흠집내기 게임이 끝나고 획득된 아이템이 화면에서 깜빡거리는 것을 보면서, 디스(diss)-플레이(play)라는 말장난을 떠올렸다.
이천표의 〈everything we know〉(2014)는 예술적 행위라는 명분으로 허용되는 여러 가지 수집, 차용, 모방 등의 절차에 대한 생산 가치를 냉철하게 묻는다. 흡사 자동차 경기장을 연상시킬 법한 임시 구조물 아래로 따닥따닥 들여놓은 작가의 작업실 물건들은 어떻게 조합하고 작동시키는가에 따라 각기 다른 경로에 놓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어떻게 보면 사회의 엄격하고 ‘쓸모 있는’ 생산 활동도 예술가의 ‘비생산적인’ 사이비 창작/모방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일종의 게임(play)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는 자신의 작업실을 전시장에 일부 옮겨놓고, 그의 작업 활동을 담은 영상을 함께 설치하면서 예술가의 생산 활동을 ‘Everything We Know’라는 범주에서 객관적 지식의 생산체계와 견준다.
기존에 거대서사로 일관하는 역사에 대한 자료 수집을 통해 상상할 수 있는 허구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던 김아영은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2014)로 다시 한 번 ‘사이비-역사(pseudo-history)’를 기록한다. 4채널 사운드 인스톨레이션으로 구성된 이 작업은 작가가 석유자본에 대한 리서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얻은 데이터를 분석하기 위하여 새로운 지식 생산 방식인 ‘기계장치의 신’과 협업한 결과를 보여준다.
그가 수집한 석유자본에 대한 데이터를 중심으로 작가가 만든 리브레토(대본) A와 ‘기계장치의 신’이 쓴 리브레토 B가 만들어지면서 작업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리브레토를 바탕으로 악보가 만들어지고, 그 악보는 그 부호에 익숙한 자들에 의해서 비 정형적인 음성을 얻게 된다. 마침내 그러한 알고리듬(algorithm, 정보처리방법)을 통해 생성된 지식은 본래의 석유자본이라는 데이터와 큰 상관없는 12개의 음성으로 남는다. 김아영은 마치 오작동된 결과물처럼 보이는 이 12개의 비상관적인 음성을 모아서 ‘무한한 혼돈’의 화음을 성공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었다.
김아영이 어느 정도 객관적인 지표의 데이터를 주관적으로 분석했다면, Sasa[44]는 주관적인 데이터를 객관적인 지표로 공식화한다. 그의 〈연례보고〉(2006~2013)는 사실적인 자료에 기반한 기록예술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1년 동안 설렁탕 몇 그릇과 자장면 몇 그릇을 먹고, 서울 시내 극장에서 영화 몇 편을 보고, 시내 대형서점에서 책을 몇 권 사고, 교통카드를 몇 번 이용했고, 휴대전화 통화를 몇 번 걸었고, 출퇴근 기록기로 작업실 출입 기록을 몇 건 얻었는지에 대한 매우 일상의 사적인 기록을 그는 매년 연례보고서 형식으로 작성했다. Sasa[44]의 기록은 한 개인의 연례보고라는 점에서 “사적인 기록이 어떻게 공적으로 소통될 수 있는가” 혹은 “개인의 기록이 어떻게 공적인 체계의 변화에 영향을 받는가”에 대한 성찰을 이끈다.
서울 주재 이란 케이블 뉴스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뉴스 제작에 관여했던 김경호는 〈On the air, In the air〉(2013)에서 단순히 미디어의 권력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매스컴을 통해 송출되는 최종 보도 뉴스 화면과 작가가 촬영한 제작본을 같은 화면에 나란히 병치시켜 놓고 거기서 발생하는 오차를 시청자(관객)가 자각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매스컴에서는 철저히 차단하는 오차와 편집을 분명하게 노출시킴으로써 오히려 작가는 미디어에 대한 수용자의 선택적 해석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셈이다. 한편 이행준의 〈환상의 여학생 부대〉(2014)는 1948년 여수에서 발생했던 여순사건에 대한 사진 한 장에서 출발한다. 그는 하나의 사회적 사건에 대한 여러 가지 소문들이 매스컴을 통해 가공되고 실제와 다르게 기억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룬다. 이에 작가는 자신이 수집해 온 수많은 사진 자료들을 이어 붙여 반복해서 보여줌으로써 맥락에서 떨어져 나온 이미지에 대한 본래의 의미를 추적하게끔 한다.
이상 10명의 작가들이 참여한 〈오작동 라이브러리〉는 현대사회의 과잉 축적된 지식과 정보에 대한 단순한 회의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식과 정보가 작동되는 사회 시스템과 그것이 지닌 객관성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그들은 ‘오작동’을 통한 전혀 다른 차원의 ‘작동법’을 실험하고 있다.
[기사입력 : 2014.0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