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이번 행사는 과거 30대 초반의 시인 조정권과 40대의 완숙한 실험작가인 김구림이 30년이 지난 노년이 되어 당시를 회고하는 감회가 깊은 행사였다. 당시의 퍼포먼스는 ‘공간시낭송회’에 참석했던 김구림의 제안으로 구현된 것이었는데, 음향이 증폭된 마이크 앞에 신문지를 펼쳐놓고 앉아 손톱을 깎는 행위를 시낭송에 개입시킨 것이다. 너무 큰 소음으로 관객은 물론 시인조차도 신경이 거슬리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무의미한 일상성을 음향으로 작품화한 것이다. 과거 중국 귀족층 여인들 중에는 신분 표시로 손톱을 기르기도 했다. 귀족이라는 신분 과시를 상징하는 손톱을 깎는다는 것은 기존의 신분, 전통, 틀 등을 자르고 새로운 세계와 시작을 알리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작가는 손톱을 깎는 행위는 권위를 부정하는 의도를 가진다고 하고 있지만 기실은 의미가 지워진 제도적 속성을 해체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깔려있다.
 
김구림은 한국현대미술사에 가장 전위적인 예술가 중 한 사람이다. 연극, 영화, 무대연출, 무대의상, 일렉트릭아트, 메일아트, 행위예술과 대지예술 등 다양한 영역을 섭렵한 작가이다. 어쩌면 대학에서의 제도적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1969년 ‘제4 집단’이라는 전위적 그룹을 결성하여 기존의 예술계에 이단적 활동을 펼침으로 기성 화단에 도전을 가하였다. 실험적인 영화작품으로 현대사회의 일상을 실험영화로 제작하여 〈1/24초의 의미〉(1969)를 선보이기도 하였고, 뚝섬 근처 한강 변 뚝방의 잔디를 기하학적 문양으로 태우는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라는 대지예술 작품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2013년 테이트모던의 초대를 받아 전시를 개최한 이후 그에 대한 조명이 인색했다는 여론들이 있으나, 최근 매우 활발한 전시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2년 서울시립미술관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제목으로 그의 초대전을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이 있으나 좀 더 본격적인 조명이 필요하다.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다양한 전위적 작품의 가치보다도 좀 더 깊이 조명해야 할 부분은 그가 융복합 예술의 개척자라는 점이다. 요즘에야 융복합이 하나의 유행처럼 너나 할 것 없이 융복합 예술가로 자처하고 있지만, 당시로선 모더니즘의 분석적 태도와 장르 편협적 사고가 팽배해 있는 상황에서 그가 연극, 음악, 무용, 문학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과 전방위적으로 교류하고 소통했던 점은 매우 의미 있는 부분이다.
이번 퍼포먼스는 마치 1차 대전의 전란을 피해 스위스 취리히에 모여든 예술가들이 집결장소였던 카바레 볼테르를 기억하게 한다. 1916년 전위 예술가인 후고 발에 의해 건립된 이 공간에서 한스 라르프, 트리스탄 차라 등이 주동이 되어 기존의 모든 문화 체계가 이룩한 업적들을 단숨에 부숴버리려는 음악적 다다이즘이 태동한 곳으로 이들의 활동은 이후 플럭서스 등 전위 예술가들의 전범이 되기도 하였다.

기존의 제도적 예술에 대한 부정이나 비판의 태도는 실험적 작가들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으나 김구림의 작품에서 보이는 일관성은 시간의 문제와 음양(陰陽)의 문제이다. 이러한 중심 주제를 통해 서구적 관점에서 제도화된 예술 영역을 전방위적으로 비판하며 이를 재해석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합리적 사유로 설명되어질 수 없는 예술의 영역을 논리화된 잣대로 규정하려 하는 기존의 입장에 동의할 수 없는 그의 일관된 태도가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적 요소이다.
우리 시대 융복합 예술의 양태는 어떠한가? 서구에서 촉발된 통섭의 논리를 따라 장르와 장르가 접합한다거나 미디어 매체나 기술에 기존 예술을 접맥시키는 수준에 머물고 있지는 않은가. 기실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 예술가와 아마추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융복합 예술이 예술에 새롭게 제공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극단적인 실험의 전통은 이미 20세기 초반에 형성되었고 다다와 플럭서스 등 전위적 실험들을 통해 충분히 실험되었다. 반예술이나 반미학 개념에 대해서도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예술의 죽음에 대해서도 충분한 논의가 존재한다. 제도가 인정하는 예술이 예술이라는 예술제도론도 이미 오래된 논의가 되었다. 그래도 우리 시대 예술은 엄연히 존재한다. 예술의 종말을 운위했지만 여전히 오늘도 예술은 탄생한다.
이번 〈1981년 5월 27일〉의 재현은 융복합이 주류를 이루는 우리 시대 예술에 새삼 의문을 제기한다. 많은 것을 결합하거나 접목시키는 것이 새로운 예술인가? 예술의 개념이 붕괴된 현 상황에서 새로운 예술의 돌파구는 무엇일까? 가벼운 일상을 날카로운 감수성으로 건져 올리며 서로 다른 장르나 매체, 예술행위를 관통하는 의미를 끄집어냄으로써 논리를 넘어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찾아내는 일이 아닐까? 

(사진: 아라리오 뮤지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