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국내외 미술 현장에서 회화(painting)에 대한 관심이 부쩍 뜨겁다. 이미 지난 세기의 미술사 속 한 시대를 특징짓는 화두로 “회화의 복귀”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던 때가 있었는데, 그 향수 어린 표현도 최근 회화의 열기와 함께 다시 등장했다. 1981년 《회화의 새로운 정신(A New Spirit in Painting)》이라는 전시를 공동 기획했던 큐레이터 크리스토스 요아히메데스(Christos Joachimedes)가 “화가들의 스튜디오가 다시 물감 통으로 채워지고 있다”고 한 말이, 그로부터 30년이 훌쩍 지난 현재에도 유효한 진단이 됐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6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치를 내세우며 시각예술 전반에 걸쳐 모색되었던 비물질화(dematerialization) 개념은 “회화의 죽음”을 단언하며 20세기 미술의 외연을 확장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로써 숭고하고 초월적인 예술은 여러모로 세속과 점점 가까워졌다. 그러한 예술 수법의 변화와 확장에 대응하며 또다시 등장한 새로운 주역들에 의해 “회화의 부활” 소식이 전해졌던 것이다. 《회화의 새로운 정신》에 이어, 1982년 베를린에서 개최된 전시 《시대정신(Zeitgeist)》도 마찬가지다. 이 전시에 참여해 과거의 역사와 문화를 참조하며 위풍당당하게 회화로 복귀한 일군의 작가들은 새로운 “시대정신”을 자신들의 새 부대에 담아내려 노력했다. 잘 알려진 대로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줄리안 슈나벨(Julian Schnabel), 데이비드 살르(David Salle), 에릭 피슬(Eric Fischl) 등과 같이 신표현주의나 새로운 리얼리즘에 접근했던 작가들이 첫 주역이었다.

새롭게 부상한 회화는 당대의 미학적·비평적 담론과 연대해 소위 포스트모던 (이후의) 회화가 떠맡게 된 소임을 계속해서 모색해왔다. 그리고 1990년대라는 충격적인 세기말의 터널을 빠져나온 2000년대 미술 현장에서는 예술을 현실의 수단으로 보고자 했던 전위가 만연했다. 그 맥락에서 지금, 회화를 자신의 예술적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려는 동시대 작가들의 수사와 전략이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져 보인다. 2013년 워커아트센터에서 열렸던 전시 《페인터 페인터(Painter Painter)》와 최근 MoMA에서의 전시 《영원한 지금: 무시간적 세상의 동시대 회화(The Forever Now: Contemporary Painting in an Atemporal World)》는 회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드러낸 확실한 지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화가들의 작업실이 물감 통으로 채워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진단했던 이들 전시는 30여 년 전 “회화의 새 정신” 혹은 “시대정신”을 직접 묻던 급진적인 태도와 다소 차이를 유지하면서 한껏 다양해진 회화의 표면을 살폈다.

최근 몇 년간, 국내에서 열린 전시에서도 회화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이 크게 부각되어 있다. 앞 다퉈 기획된 전시들 중에, 《세계의 네 모서리(Four Corners of the World)》(하이트컬렉션, 2013), 《시대의 눈-회화 : Multi-Painting》(OCI미술관, 2014), 《오늘의 살롱》(커먼센터, 2014), 《두렵지만 황홀한》(하이트컬렉션, 2015), 《그림, 그림자》(플라토, 2015) 등이 대표적인 전시다. 게다가 여러 공모전 및 수상전과 크고 작은 개인전까지 헤아리면, 실제로 회화에 대한 공통의 관심이 일련의 현상처럼 번져나갔다 해도 무리는 아니다. 소위 “전통적” 회화에 다시 접근해야 했던 이유와 명분은 한마디로 요약할 수 없이 많은 할 말을 남겼지만, 어찌 됐건 회화의 프레임 안팎을 넘나들면서 더욱 정교해진 주체의 시각 경험은 오늘날의 회화가 함의하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때문에 이 글에서는, 그토록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몸집이 커질 대로 커진 회화가 다시 오늘의 시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늘 그랬듯이 익숙한 태도로 재등장하게 된 일련의 상황에 주목해 보려 한다.

조나단 왓킨스가 기획한 전시로 하이트컬렉션에서 열렸던 《세계의 네 모서리》는 전시 제목에서처럼 사각형 프레임이라는 제한된 회화 형식을 강조했다. 하지만 캔버스 틀이 만들어내는 뻔한 그리드에 머물지 않고, 각각의　꼭짓점을 강조함으로써 기존 회화 형식에서 해방된, 아니 기존 회화 형식이 태생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개인의 상상적인 것을 대비시켰다. 고전적인 회화의 형식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오히려 그 형식에 내재되어 있는 탈주의 지점을 상상한 것이다. 아쉽게도 이 전시에는 7인의 해외작가들만 참여했기 때문에 국내 작가들이 같은 문제로 공유하는 지점을 직접 가늠해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각의 틀을 유지하며 그 프레임이 생성해내는 의미와 가능성에 대해 실험하는 일군의 작가들을 생각해내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2012년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열렸던 《제12회 송은미술대상》에서 작가 최선이 보여준 〈흰 그림〉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수시로 회화의 형식과 내용을 왕복하며 회화의 프레임을 하나의 상징적인 경계로 다뤘다. 최선의 〈흰 그림〉은 언뜻 무제(untitled)의 거대한 색면 추상 형식을 유지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사각의 유산지에 돼지 한 마리에서 나온 기름을 두껍게 발라 당시 구제역 살처분 현장에 스며든 현실의 충격과 공포의 실체를 다루고 있다. 첫인상에서 그의 그림은 세계를 뭉뚱그려 조망할 수 있는 모더니즘적 주체의 시각으로 완성된 추상회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흰 그림〉은 그러한 거리 두기가 애초에 불가능하다. 끊임없이 녹아서 흘러내리는 돼지기름처럼, 실제의 사건이 만들어낸 “공허함”은 화면을 물질로 꽉 채운 모더니즘 추상회화의 현재성 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현실적이다.    

한편 지난해 OCI 미술관에서 기획한 전시 《시대의 눈-회화: Multi-Painting》과 커먼센터의 《오늘의 살롱》에 모두 참여했던 강서경은 회화를 그림 그리는 행위와 관련해 시각적으로 풀어갔다. 강서경의 회화-설치 작업은 1960년대 에바 헤세(Eva Hesse)가 액자의 틀을 실로 촘촘히 감아서 회화의 공간과 현실의 공간을 물리적으로 연결시켜 놓았던 연극적인 상황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강서경은 완성된 그림을 바닥에서 수평으로 쌓아올려 오히려 물감이 흘러내린 캔버스의 모서리를 강조하거나, 그림과 액자의 틀의 불일치를 통해 조형적 균형을 모색하는 이중적 태도를 드러냈다. 그의 회화-설치는 붓질이라는 감각적인 행위를 모티프로 하여 동어반복적인 쌓기, 감기, 긋기 등의 수행성으로 확장되는 일련의 회화적 과정을 모색했다.   

그 밖에도 지난 한 해, 국립현대미술관의 《젊은모색》과 인사미술공간의 AYAF 전시공모 결과만을 보더라도 젊은 세대의 작가들이 보여준 회화에 대한 공감은 하나의 현상처럼 특징적으로 나타났다. 김도희, 김하영, 노상호, 윤향로, 조송, 배윤환, 차혜림, 허수영 등에 의해 다뤄진 회화의 시각 언어는 더욱 세련되고 정교해 보이기까지 하다. 특히 노상호, 배윤환, 차혜림의 회화에서 강조되는 서사적 구조는 앞서 언급했던 회화의 형식과 행위 못지않게 전통 회화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해왔다. 그런 서사를 이들은 매우 전략적으로 활용한다. 서사가 가진 시·공간적 개념뿐 아니라 서사의 텍스트와 회화의 이미지 간의 지시체계 등을 그들은 교묘히 건드린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결과적으로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수단으로 하여 자신들이 세계를 경험하는 상황 그 자체를 도리어 서사적 회화로 구현한다. 그들은 더 이상 세계에 대한 관찰자로서 주체의 확고한 시각을 붙들고 그림을 그렸던 과거의 유산과는 조금 떨어져 있다. 오히려 오늘의 회화는 주체의 시각을 회화의 내부 어딘가에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숨겨놓고, 완전하게 분산돼버린 현실세계의 파편적인 풍경을 재현/표상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회화는 늘 그렇게 변화하는 세계에 놓인 주체의 시각을 닮는다. 그것이 진정한 회화의 시대정신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