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l 〈네이티브 스피커〉는

언어, 삶, 경계에 관한 다큐멘터리 연극이다. 나는 2013년 말레이시아에 파견되어 9개월간 한국어를 가르쳤다. 태어나 자연스럽게 배운 모국어를 외국어로 가르치는 경험은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던 한국어, 한국문화, 그리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낯설게 바라보게 했다. 또한 한국에 살고 있는 비한국인들, 자신이 태어난 곳을 떠나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이주민 혹은 이방인들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과연 원어민(Native Speaker)이란, 비원어민이란 무엇일까? 모국어와 모국(母國)이 ‘나’라는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쳐왔을까? 한국인은 뭐고, 외국인은 뭘까?…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경계들에 대해 수많은 질문들이 생겨났고,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경계 선상에 있는 혹은 넘나드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네이티브 스피커〉는 한국 사회에서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사람들, 즉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니거나, 모국어보다 외국어가 더 편하거나, 혹은 직업적으로 언어와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 직접 무대에 올라 자기와 타인의 언어,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 연극이다. 개인의 기억과 경험, 사적인 기록물, 언어 교재, 통계와 설문들, 실시간으로 발화되는 말, 소리, 움직임, 이미지 등이 모두 공연의 재료가 된다.

l 창작 과정

‘누가 출연하는가’가 공연의 내용과 형식을 결정짓는 리서치 기반의 공연이다. 지난 1월부터 약 10개월 동안 출연자 섭외를 위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인터뷰를 진행해왔다. 단기 여행 중인 외국인부터 20년 넘게 한국에 살고 있는 이주민, 유학생, 교포, 화교 등 국적과 나이, 직업, 성별에 관계 없이 ‘한국에서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닌 사람들’을 기준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처음에는 언어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인터뷰를 할수록 언어와 국적을 넘어서는 개개인의 삶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다양한 삶의 결들을 ‘외국인’ 혹은 ‘이주민’이라는 이름으로 단순화하는 제도와 정책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만남의 과정에서 교감의 기쁨을 느끼기도 했지만, 수차례 거절을 당하며 좌절을 경험하기도 했다. 출연자 섭외를 위한 인터뷰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그만큼 이 프로젝트에 대해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며 방향성을 만들어올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현재 7~8명의 출연자/참여자와 함께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대본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언어, 이주, 다문화, 다큐멘터리 연극 등 본 공연을 발전시키기 위해 ‘공부’해야 할 분야도 많았다. 출연자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시에 주제와 관련된 학술, 통계자료, 기사, 영상자료, 언어 교재 등을 조사하고 연구했고, 특히 다큐멘터리 연극이라는 공연미학에 대해서는 관련 논문과 공연 자료들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해외 리서치를 다녀온 것이 창작에 있어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l 해외리서치 : 독일 ‘리미니 프로토콜’의 다큐멘터리 연극

해외리서치로, 지난 9월 독일의 베를린, 바이마르, 뒤스부르크를 방문하여 다양한 공연과 전시를 관람했다. 이번 해외리서치의 목적은 분명했다. 2009년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이라는 공연으로 나에게 충격과 영감을 주었던 극단 ‘리미니 프로토콜’을 만나고 오는 것이었다.
올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70주년을 기념하여 바이마르국립극장과 리미니 프로토콜이 공동제작한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제1, 2권〉(Adolf Hitler: Mein Kampf, Band 1 & 2)이라는 신작을 관람하고, 연출가 헬가르트 하우크와 배우 시빌라 플뢰게를 만났다. 미리 이메일을 보내 리서치의 목적과 〈네이티브 스피커〉에 관한 설명을 하기도 했지만, 연출가 특유의 포용력과 여유로움 덕분에 만남은 꽤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그동안 다큐멘터리 연극을 만드는 과정에 대해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고, 〈네이티브 스피커〉 창작에 대한 실질적인 조언과 격려를 얻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과연 잘 가고 있는 것일까’ 하는 불확실함이 컸었는데, 리미니 프로토콜의 작업 과정을 들으며 안도와 함께 큰 위안을 얻었다. 이후의 구체적인 창작 계획을 세우고, 앞으로 추진해나갈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이 이번 해외리서치의 가장 큰 수확이 아닐까 생각한다. 독일을 다녀와서 바로 1차 섭외 출연자 및 스태프들과 함께 창작 워크숍을 시작하였고, 2차 출연자 섭외를 확정한 후 공연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l 어려움과 도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서치 기반의 공연 창작은 여전히 불안하다. 기댈 수 있는 텍스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참고할 만한 선례도 그리 많지 않다. 각자의 생활과 직업이 있는 일반인과 함께 공연을 만드는 과정도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들을 통해서 공연을 만드는 하나의 길을 닦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일반적인 연극의 텍스트가 희곡이라면, 이 공연의 텍스트는 ‘사람’이다. 너무나 변화무쌍하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 늘 긴장하며 여러 변수들을 고려해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텍스트는 불안을 주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견딜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견디는 과정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는 짜릿함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네이티브 스피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시간과 공간이 쌓여서 만들어지고 있다. 어딘가에서 와서 어디론가 가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마주치며 공연을 만들어간다. 과연 극장에서는 또 다른 누군가의 시공간과 어떻게 마주칠 수 있을지 기대해 본다.

2016년 1월 22일~24일
문화역서울284R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