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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치인 김종필과 우리나라 최초의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홍승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최초의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음반과 공연 장면
    최초의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음반과 공연 장면


김종필 전 총리의 부인 박영옥 여사가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면서 세간의 이목이 다시 한 번 그에게 모아지고 있다. 과거와 현재를 망라한 우리 정치계의 거물들이 대거 조문을 하고 그들과 김 전 총리가 나눈 이야기가 보도되면서 대다수는 그 말에 담긴 정치적 의미를 찾는 데 온통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더러는 부인에 대한 그의 애틋한 사랑과 그것을 표현한 남다른 감성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휠체어 신세를 지는 불편한 몸으로 아내의 병상을 지켰다는 것도 감동이었지만 아흔에 접어든 노정객이 마지막 입맞춤으로 평생의 반려자를 떠나보냈다는 이야기가 더욱 뭉클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김 전 총리가 6.25 전란 중에 박 여사와 결혼을 하면서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한 마디만 더(One word more)"에 나오는 한 구절 “한 번, 단 한 번, 단 한 사람에게(Once, only once, and for one only)"를 인용하며 사랑을 고백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치가에게, 더구나 그 세대의 정치가에게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듯한 그의 이러한 면면이 의외라는 반응도 나타나고 있다.
제3공화국의 2인자이자 실세였던 그는 최고 권력자의 견제와 주변의 질시로 말미암아 두 번씩이나 원치 않는 외유를 떠나야 했다. 두 번째 외유에서 돌아와 1966년 8월 13일자 조선일보에 음악평론가 박용구와 대담한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김종필) “저번 외유 때의 일이지요. 마침 탱글우드(미국 매사추세츠주 소재)에서 저 유명한 유진 올만디가 보스턴 심포니를 지휘해서 연주를 한다지 않아요. 그래서 3백50km를 달려가 들었지요. 그 레퍼토리 가운데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요.”
(박용구) “쇼팽의 제1번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김종필) “나는 솔로보다는 콘체르토를 좋아해요. 피아노에선 쇼팽의 제1번, 바이올린은 멘델스존의 콘체르토이지요.”
(박용구) “솔로는 역시 개인플레이에 그치는 것이고 콘체르토는 솔로 악기와 오케스트라의 대화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김종필)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 사회가 염원하는 건 그런 대화지요. 그 대화 속에서 하모니가 빚어지면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않습니까. 내가 음악을 동경하는 건 어쩌면 정치에서 이룩해보고자 하는 이상이 그곳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박용구) “음악이 흐르는 정치, 참 좋은 이야기입니다.”
(김종필) “스웨덴에서 목격한 일입니다. 국왕이 소년 오케스트라에 끼어서 클라리넷을 불고 있더란 말입니다. 우리 정치인들은 메말라 있어요. 낡은 권위의식에 사로잡혀서 민중과 어울려 하모니를 만들 생각을 안 하니까 메마를 수밖에 없지요. 음악도 우리나라에선 전문가가 되면 그렇지 않습니까?”
(박용구) “...”
(김종필) “어머니가 극성스럽게 비싼 수업료를 내가면서 피아노를 가르치지만 그 피아노가 생활을 부드럽게 해주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음악이 생활화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가 회사에서 피로에 지쳐 귀가하신 아버지를 위해서 피아노를 들려준다든가 하여 가정의 하모니에 음악이 참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아닙니까”

그로부터 두 달이 흐른 1966년 10월 26일,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들어 우리나라 무대에 올린 최초의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가 서울시민회관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우리 설화 ‘배비장전’에서 그 이야기를 가져온 것으로 무려 34편에 이르는 우리의 고전소설과 설화를 검토하여 엄선하였다. ‘배비장전’은 원래 판소리 열두 마당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고종 때 신재효가 여섯 마당으로 줄이면서 빠졌다고 한다. 신임 제주목사를 따라 아전으로 부임한 주인공 배비장이 처음에는 짐짓 청백리로 살려고 하나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를 골려주려고 기생 애랑을 앞세운 탓에 그만 골탕을 먹고 망신을 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는 제주 방언으로 “살며시 오세요”라는 뜻으로 원작보다는 배비장과 애랑의 사랑 이야기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공연에 들어간 300여 명의 인원과 300여만 원의 제작비는 당시로는 그 누구도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규모였고 나흘간 공연장을 찾은 1만6천여 명의 관객 또한 전례가 없는 숫자였다. 원래는 이후로도 계속 공연될 예정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중단한 것은 존슨대통령의 갑작스런 방한으로 대규모 환영행사를 치를 장소가 달리 없어 공연장을 비워야 했기 때문이다.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는 김영수 극본에 박용구와 황운헌이 가사를 쓰고 최창권이 작곡을 했다. 연출은 임영웅과 백은선이, 안무는 임성남이 맡았다. 주인공인 애랑과 배비장은 가수 패티 김과 한상림이 열연했고 방자 역에는 나영수, 채봉 역에는 소프라노 문혜란이 발탁되었는가 하면 코미디언 곽규석과 탤런트 김성원까지 동원되는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예인과 국악인, 클래식 음악가까지 모두 망라된 전대미문의 공연단이었다.
이들이 곧 “예그린 악단”이었고 예그린 악단을 만든 이가 김종필이었다. 예그린 악단은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에 창단되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은 혼란으로 어수선했던 사회의 분위기를 가라앉히려면 북한의 “피바다 가극단”에 필적할 만한 공연단의 활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이를 주도하였고 이듬해 1월, 춤과 음악이 어우러진 “3천만의 향연”을 창단공연으로 무대에 올렸다. 그로부터 1년 만인 1963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자리에서 물러나 외유를 떠나면서 예그린 악단도 해산의 운명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1966년 두 번째 외유에서 돌아온 김종필이 공화당 의장으로 부임하면서 예그린 악단도 다시 일어섰고 김종필의 확고한 의지와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우리나라 최초의 뮤지컬을 탄생시켰다.  
예그린 악단은 모든 면에서 시대를 앞서 갔다. 단원들의 월급은 보통 회사원들의 다섯 배나 되었고 공연 광고를 차체에 달고 다니는 출퇴근 전용버스가 제공되었다. 악단이 보유한 40인조 오케스트라는 지금의 초대형 뮤지컬 공연에서도 엄두를 내기 힘든 규모이다. 장르의 벽을 허문 파격적인 시도로 말미암아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오케스트라 단원들 중에는 대중가요 작곡자의 지휘를 외면하고 악보만 보고 연주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끈질긴 설득과 관객들의 환호로 점차 마음을 마음을 바꾸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한국무용을 전공한 단원들에게 팔이 다 드러난 옷을 입히고 성악가들에게 발레 연습을 시켰는가 하면 정확한 가사 전달을 위해 소위 벨칸토 발성을 포기하고 우리말에 맞는 새로운 발성을 익히게 했으니 처음에 겪었을 혼란과 저항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살짜기 옵서예〉의 마케팅은 지금에나 겨우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운영홍보실장이었던 황운헌은 공연을 올리기 전에 이미 음반부터 만들어 방송국에 돌렸고, 주제가인 ‘살짜기 옵서예’가 먼저 방송을 타면서 그 인기와 관심이 공연의 흥행으로 이어졌다.          
1968년 김종필이 공화당을 떠나면서 예그린 악단 또한 다시 해체의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로 여러 차례 부활을 시도하지만 여의치 않아 국립극장 산하의 국립가무단으로, 다시 세종문화회관 산하의 시립가무단으로 그 간판을 바꾸며 명맥을 이어가게 된다.               

“희랍 사람들은 정치를 예술이라고 그랬답니다. 예술의 경지에까지 정치를 끌어올리려 했으니 희랍 정치가들의 꿈이 얼마나 장하고 위대합니까? 모든 예술이 아름다운 음악을 동경하듯이 모든 정치가 진정 아름다운 음악의 세계를 동경하고 개척해 놓는다면 그게 바로 이상향이죠. 음악적인 국가, 음악적인 정치, 말만 들어도 그게 바로 인간의 유토피아구나 느껴집니다.”

김종필 전 총리가 오래전 남긴 말이다. 아흔을 넘긴 그는 일찌감치 부인과 함께 묻힐 묘소에 세울 비석의 비문을 마련했다고 하는데 그 마지막은 다음과 같다.

“내조의 덕을 베풀어준 영세(永世) 반려(半侶)와 함께 이곳에 누웠노라”

문득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의 묘비명이 생각난다.

“삶과 죽음에 차가운 시선을 던져라. 말을 탄 나그네여, 그냥 지나쳐 가라. Cast a cold eye on life, on death. Horseman, pass by."


홍승찬
홍승찬

서울대 음악대학 작곡과 이론전공과, 서울대 대학원 음악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했으며, 서울대 대학원 서양음악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예술의전당 공연예술감독, 예술의전당 이사, 대통령실 문화정책자문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올해의 예술상 운영위원장, KBS교향악단 운영위원, 국립발레단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전공 교수,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이사, 합창단 ‘음악이 있는 마을’ 기획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 ‘예술경영입문’과 ‘예술경영의 이론과 실제’, ‘클래식이 필요한 순간들’, ‘생각의 정거장’, ‘그땐 미처 몰랐던 클래식의 즐거움’, ‘인문학 명강, 서양고전편(공저)’이 있고 지금까지 다수의 논문과 연구용역, 비평 등의 저술활동과 공연기획, 해설, 문화예술 강좌, 방송해설, 컨설팅 등의 활동을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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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5.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