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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무엇이 카네기홀을 세계 최고로 만들었나?

홍승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카네기홀 전경
    카네기홀 전경

뉴욕의 카네기홀은 미국을 대표하는 공연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세계 여러 나라 무대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우리 연주자들은 물론 대중음악인들까지도 카네기홀에서 연주했다는 사실을 자랑삼을 만큼 명성이 자자할 뿐만 아니라 음향에 있어서도 세계 어느 공연장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 연주회장이다. 카네기홀이 없는 뉴욕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문을 열자마자 차이콥스키와 말러와 같은 역사적인 인물들을 불러들여 그들의 음악을 직접 무대에 올렸고 토스카니니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지휘자들과 연주자들은 물론 비틀즈나 롤링스톤즈와 같은 불멸의 팝 아티스트들까지 모두 카네기 홀에 그들의 커다란 발자국을 남겼다.  

카네기홀은 1891년 개관한 이후 1898년 철강왕 카네기의 출자로 대대적인 개축을 거친 이후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이후 뉴욕 시민들은 물론 전 세계 음악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카네기홀이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순탄한 여정을 거쳤던 것은 아니다. 1960년, 카네기홀은 재정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결국 시 당국이 건물을 사들이기에 이르렀지만, 1962년 링컨 센터가 문을 열자 카네기홀의 독보적인 위상마저 위협을 받게 되었다. 결국 카네기홀은 여러 가지 난관을 겪으면서 존폐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때 등장한 구세주가 바로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이었다. 그가 앞장을 서면서 공연장의 보수와 개축에 필요한 기금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대대적인 공사가 차질 없이 마무리되면서 과거의 명성을 다시 찾게 되었다. 그래서 재개관 이후 3천여 석의 대공연장은 아이작 스턴홀로 불리기도 한다. 결국, 오늘날 카네기홀이 있기까지 두 사람의 공헌이 절대적이었으니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가 첫 번째고 두 번째는 미국 음악계의 대부라 일컬을 만한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인 셈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카네기홀의 찬란한 영광이 있기까지 이처럼 드러난 두 사람 말고도 숨어있는 또 한 사람의 공헌이 있었으니 그는 지금도 카네기홀의 문헌관리자(Archivist)로 스스로의 역할을 누구보다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지노 프란체스코니(Gino Francesconi)이다. 한때 촉망받는 음악도였던 그는 줄리어드에서 지휘를 전공했고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지만 재정적인 문제로 어쩔 수 없이 뉴욕으로 돌아온 후, 학창시절 보조 지휘자로 일했던 카네기홀의 문을 다시 두드리게 되었다. 당시 카네기홀은 다가올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스스로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할 만한 자료와 문헌들을 챙겨두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던 터라 일자리를 찾는 이 젊은 음악가에게 그 중요한 일을 제안했고 프란체스코니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날부터 그는 카네기홀에 관한 많은 기록과 자료들을 찾아서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념비적인 공연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열린 이 공연장은 당시 티켓과 팜플렛은 물론 포스터까지도 전혀 보관하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는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공연이 있었는지를 확인해 줄 문서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고,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차이콥스키가 직접 지휘를 했던 1891년 개관기념 공연의 자료도 찾을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이라면 누구나 포기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지만 그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전 세계의 벼룩시장을 누비고 인터넷의 경매 사이트를 샅샅이 뒤졌는가 하면 카네기홀을 거쳐 간 음악인들과 그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고 직접 찾아가는 일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심지어는 ‘미국 은퇴자 연맹’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그 기관지에 “카네기홀에 관련된 모든 기록을 모읍니다”라는 제목으로 기고를 하기도 하고, 나이가 많은 은퇴자들 가운데 혹시 초창기 카네기홀을 다녀간 사람이 있다면 그들로부터 당시의 자료는 물론 기억이나 기록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카네기홀에 관한 기록들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제보를 부탁했다. 그렇게 하나씩 찾아내서 기증 받고 구입한 자료들 가운데는 번스타인을 뉴욕시립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임명하는 문서에서부터 리스트와 스토코프스키 같은 위대한 음악가들의 자필 편지들, 개관기념 공연의 티켓, 비틀즈 공연 당시의 사진과 친필 사인이 있는가 하면 초창기 무대 조명에 사용되었던 전구까지 포함되어 있었고, 기증 받은 물품 중 전설적인 재즈 디바인 엘라 피츠제럴드가 공연에서 썼다는 안경과 카라얀의 지휘봉, 베니 굿맨의 클라리넷 등은 구입 비용을 절약한 대신 지금까지도 엄청난 보험료를 감당해야 하는 애물단지 컬렉션이기도 하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하나 둘 모아서 정리한 자료들은 1991년 카네기홀이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에 로즈 박물관을 열면서 일반에 공개되었다. 카네기홀의 로비와 벽면을 가득 채운 자료들로 말미암아 지난 100년 동안 카네기홀 무대에 섰던 수많은 음악인들이 누구였는지를 밝힐 수 있게 되었고 하나같이 모두 그 시대를 대표했던 그들의 면면으로 말미암아 카네기홀의 위상 또한 세계 최고임을 증명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프란체스코니는 카네기홀에 관한 자료 찾는 일을 계속하고 있으며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카네기홀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제대로 알고 기억할 수 있도록 ‘카네기홀 VIP 투어'에 나서서 그가 수집하고 전시한 자료들을 방문객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차이콥스키의 지휘로 문을 연 이후 한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늘 그 시대를 대표하는 무수한 음악인들이 카네기홀의 무대를 밟았지만 정작 그 흔적들을 찾아서 사람들 앞에 자랑하게 된 것은 100년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그리고 이마저도 지노 프란체스코니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기적이다. 2013년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예술의전당이 25주년을 맞이했고 그 길지 않은 세월에 쌓아올린 그들의 업적과 위상을 자랑하는 여러 행사들을 열었지만 그 가운데 어느 하나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기록과 자료들을 모아서 보여주려는 노력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예술의전당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어느 공연장도 스스로의 역사를 보여주는 박물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실 공연장만을 탓할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 이름이 낯설지 않은 다른 나라의 자동차 제조사들은 모두 가지고 있으나 생산량과 품질 면에서 오래전부터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우리나라 굴지의 자동차 제조사에 없는 것 또한 박물관이다. 그나마 2016년에 그 중 한 회사가 박물관을 연다고 하니 기대하고 성원하는 마음으로 기다려 본다. 앞으로 또 20여 년이 흐르고 예술의전당이 50주년을 맞이할 즈음이면 예술의전당 어딘가에 그들만의 박물관, 혹은 아카이브가 문을 열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되도록 우리 모두 관심을 가지고 함께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사진: Wikipedia)


홍승찬
홍승찬

서울대 음악대학 작곡과 이론전공과, 서울대 대학원 음악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했으며, 서울대 대학원 서양음악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예술의전당 공연예술감독, 예술의전당 이사, 대통령실 문화정책자문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올해의 예술상 운영위원장, KBS교향악단 운영위원, 국립발레단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전공 교수,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이사, 합창단 ‘음악이 있는 마을’ 기획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 ‘예술경영입문’과 ‘예술경영의 이론과 실제’, ‘클래식이 필요한 순간들’, ‘생각의 정거장’, ‘그땐 미처 몰랐던 클래식의 즐거움’, ‘인문학 명강, 서양고전편(공저)’이 있고 지금까지 다수의 논문과 연구용역, 비평 등의 저술활동과 공연기획, 해설, 문화예술 강좌, 방송해설, 컨설팅 등의 활동을 해오고 있다.


[기사입력 : 2015.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