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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

홍승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헨릭 구레츠키(Henryk Gorecki)와 교향곡 3번을 녹음한 음반
    헨릭 구레츠키(Henryk Gorecki)와 교향곡 3번을 녹음한 음반


현대음악은 말 그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에 만들어진 음악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대개는 20세기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작곡가들이 모색하여 시도하고 있는 새롭고 실험적인 음악들을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베토벤 바이러스에 등장해서 유명해진 존 케이지의 〈4분 33초〉란 곡은 아시다시피 4분 33초간 아무런 연주도 하지 않는 곡입니다. 악기에서 나는 소리만 음악이 아니라 청중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는 물론 침묵의 순간, 흐르는 시간 그 자체도 음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곡에서는 악기를 부수거나 완전히 해체하는 것이 음악이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너무나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것을 현대음악이라고 생각하는 탓에,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조차 현대음악에는 별로 관심이 없거나 심지어 거부감을 가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 때문에 연주회를 통해 들을 기회가 많지 않을 뿐더러 음반으로 만들어지는 일은 더더욱 드뭅니다.
그런데 1991년에 이런 통념과 편견을 깨는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폴란드의 대표적인 현대음악 작곡가 헨릭 구레츠키(Henryk Gorecki)의 교향곡 3번을 녹음한 음반이 빌보드 차트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 31주 연속 1위를 차지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운 것입니다. 이 음반은 순식간에 10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면서 현대음악으로선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관심과 호응을 이끌어냈습니다.
폴란드를 대표하는 현대음악 작곡가인 구레츠키는 단순하면서 보편적인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음악을 추구했고 이 작품 또한 그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슬픔의 노래”라는 부제가 붙은 이 곡은 오래 전부터 폴란드에 전해 내려오고 있는 카톨릭 교회의 성가와 민요의 가사와 선율을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향곡이라고 하지만 3개의 악장 모두 소프라노가 부르는 노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사의 단어와 구절을 찬찬히 읽다 보면 이 작품의 매력은 음악보다 오히려 가사에 담긴 내용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얼핏 구레츠키가 추구한 보편적인 설득력이 “슬픔”이라는 정서에 모아지면서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닌가 짐작하게 됩니다.

1악장의 가사는 폴란드의 수도원에 전해지고 있는 ‘성십자가 탄식 기도문’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나의 아들,
내 몸에서 태어난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상처를 나에게 나누어 다오.
언제나 내 마음 속에 너를 품고 있었던,
진심으로 너를 돌보았던 어미에게
너의 목소리라도 들려주어 기쁘게 해다오.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기막힌 심정이 절절히 녹아 있는 곡이죠. 세상의 어머니들이라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곡입니다.

다음 2악장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있던 18세의 유태인 소녀가 가스실로 끌려가기 전에, 남아 있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벽에 쓴 낙서를 가사로 삼고 있습니다.

비록 내가 먼저 떠나가지만 엄마 울지 마세요.
고결하신 성처녀 아베 마리아여. 저를 도와주소서.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카토비체에서 공부를 하고 그곳 국립음악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던 구레츠키는 아마도 이 역사의 비극적인 현장에서 커다란 충격과 슬픔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악장은 폴란드의 또 다른 역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독일과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같은 강대국들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당했던 폴란드는 숱한 전쟁에서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젊은 목숨들이 희생당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3악장에선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절절한 슬픔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어디로 갔는가. 내 사랑하는 아들은?
전란이 일어났을 때 내 아들은 잔인한 적에게 죽임을 당했겠지.
오, 너 몹쓸 인간아. 가장 성스러운 신의 이름으로 나에게 말해다오.
왜 내 아들을 죽였는지.
이제 다시는 아들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으니,
내가 울고 울어 내 늙은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강을 만들어도
그들은 내 아들을 살리지 못하리라.

그렇습니다. 국경을 넘고 인종을 초월해서 모든 인간의 마을을 움직이는 감정은 “슬픔”입니다. 그리고 그 슬픔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주었던 것입니다.

자식을 먼저 보낸 어버이의 슬픔이라면 뤼케르트의 시에 곡을 붙인 말러의 가곡 〈죽은 아이를 그리워하는 노래〉도 있습니다. 각각의 노래는 그 제목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합니다. 1곡 ‘이제 태양은 저토록 찬란하게 떠오르려 하네(Nun will die Sonn’ so hell aufgehen)’, 2곡 ‘왜 그처럼 어두운 눈길을 보냈는지 이젠 알겠네(Nun seh’ich wohl, warum so dunkle Flammen)’, 3곡 ‘네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설 때면(Wenn dein Mutterlein)’, 그리고 4곡 ‘때로 난 아이들이 그저 놀러나간 거라고 생각하지(Oft denk’ich, sie sind nur ausgegangen)’ 5곡 ‘이런 날씨에(In diesem wetter)’가 그 순서입니다.
세 번째 곡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네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설 때면/그래서 내가 고개를 돌려 네 엄마를 바라볼 때면/엄마 얼굴을 먼저 쳐다보는 대신/난 네 귀여운 얼굴이 나타날 것 같아/그 곁, 문지방 뒤부터 보게 되는구나/늘 그랬듯 기쁨이 넘치는 밝은 얼굴로/네가 들어설 것 같아서 말이다, 내 귀여운 딸아...” 네 번째 곡에서는 아이의 죽음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해 잠시 밖으로 놀러나가서 집에 없는 것이려니 믿으려 믿고 싶어 하다가 마지막 곡에 이르면 마침내 “이제 아이들은 마치 엄마 집에 있는 것처럼 편히 쉬고 있네. 폭풍우를 두려워할 일도 이젠 없지. 하느님의 손길이 지켜주시는 가운데 그 애들은 엄마 곁에서처럼 쉬고 있구나.” 라며 슬픔을 삼키다가 “죽음은 강하다. 그러나 사랑의 힘은 더 강하다.”는 말로 스스로를,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로합니다.

작곡가 구레츠키는 어느 인터뷰에서 “슬픔은 형벌이자 동시에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슬픔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인생의 일부로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존재가 아닌가 합니다. 지나간 슬픔들, 그리고 앞으로 부딪혀야 할 또 많은 슬픔들을 끝없는 사랑으로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축복인 듯 이겨낼 날이 있을 겁니다.


홍승찬
홍승찬

서울대 음악대학 작곡과 이론전공과, 서울대 대학원 음악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했으며, 서울대 대학원 서양음악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예술의전당 공연예술감독, 예술의전당 이사, 대통령실 문화정책자문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올해의 예술상 운영위원장, KBS교향악단 운영위원, 국립발레단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전공 교수,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이사, 합창단 ‘음악이 있는 마을’ 기획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 ‘예술경영입문’과 ‘예술경영의 이론과 실제’, ‘클래식이 필요한 순간들’, ‘생각의 정거장’, ‘그땐 미처 몰랐던 클래식의 즐거움’, ‘인문학 명강, 서양고전편(공저)’이 있고 지금까지 다수의 논문과 연구용역, 비평 등의 저술활동과 공연기획, 해설, 문화예술 강좌, 방송해설, 컨설팅 등의 활동을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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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5.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