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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사람

동시대의 한국춤을 만드는 무용가 김매자

문애령 (무용평론가)
  • 무용가 김매자
    무용가 김매자

창무예술원 김매자 이사장은 무용계에서 가장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인물 중 하나다. 제1회 한성준예술상을 수상한 원로무용가이자 창작무용단 창무회 수장이며 창무국제무용제를 20여 년간 운영해왔다. 또한 홍대 근처에 위치한 포스트극장 책임자이자 월간 「몸」 발행인이다. 이 모든 직책이 자신의 춤 세계를 넓히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었다고 김 이사장은 답한다. 일인 다역, 그중 가장 열성을 쏟는 영역은 아무래도 공연이다. 춤 훈련과정, 안무에 대한 생각, 외국무용가 초청 등을 이야기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현재 준비 중인 개인공연과 국제무용제가 부상했다. 특히 7월 말에 열리는 ‘창무국제무용제’는 올해부터 국고 사업에 선정되어 더욱 더 내실을 기하게 되었다. 김이사장은 무용에 관한한 생산과 소비의 순환과정을 모두 장악한 보기 드문 열정의 소유자다. 이화여대 무용과를 졸업하고 모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한국적인 창작무용을 선도해 왔다.

Q. 2014년도 아르코 구술채록 사업 대상자로 선정되어 일대기를 정리하는 영상과 책자를 남기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장 활발한 활동을 자랑하는 현역이십니다. 요즘은 한성준예술상 수상 기념공연과 창무국제무용제를 준비 중이신데 먼저 기념 공연에 대한 소개를 해주시지요.

올 2월에 제가 제1회 ‘한성준 예술상’을 받았지요. 지금까지 받은 어떤 상보다도 자랑스럽고, 마음이 뭉클할 정도로 영광스러운 상입니다. 한성준은 우리 무용계의 아버지이고, 최승희를 비롯한 모든 무용가에게 영향을 끼치신 분이지요. 이번 공연은 일종의 부상으로, 상금 대신 전체 공연비용을 부담해줬습니다. 6월 14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솔로 다섯 작품을 했는데, 그중에 내가 네 개를 췄어요. 첫 작품은 〈지전 살풀이〉, 두 번째는 내 산조 〈숨〉이고요. 세 번째는 〈춤본Ⅱ〉, 중요한 건 이게 돌아가신 박병천 선생님 구음이었는데, 진도굿 하시는 분들이 자유롭게 주고받으면서 구음을 했어요. 근데 너무 즉흥성이 강해서 다시하기가 어렵다고 했는데, 지금 진도 그 계통에 계시는 두 젊은 음악가들이 실험적으로 해보았습니다. 네 번째 무대는 카롤린 칼송하고 같이 안무했던 〈풀 문(Full Moon)〉 중 솔로를, 마지막으로 얼마 전 KBS ‘불후의 명곡’에서 춤춘 〈봄날은 간다〉를 창무회 단원들과 함께했어요. 이번 공연에서도 대중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넣어보고 싶어서 뮤지컬 가수 임태경이 노래했습니다. 


Q. 선생님이 만드신 무용단 창무회는 참 특별한 단체지요. 리옹 비엔날레 예술감독 기 다르메가 “도제교육의 산실인 창무회의 고유한 예술성”을 최고로 평가했듯이 주요 단원들의 연륜이 남다릅니다. 창무회는 어떤 계기로 창단하셨습니까?

내가 1972년도에 대학교수가 되었고, 76년 12월에 졸업생들이 모여서 창무회를 만들었어요. 전통의 정신을 가지고 창작을 하자는 생각에 궁중무용으로 유명하신 김천흥 선생님께 여쭸더니 ‘창작무용연구회’로 해라, 무용단으로 공연할 때는 ‘창무회’로 하면 좋겠다고 하셨지요. 창무회 초기 단원들은 모두 대학원 졸업생으로, 전통춤 한바탕을 춰서 통과하고 전통공연에 대한 논문 한 편을 써야 입단할 수 있었어요.

Q. 창작무용단체인데 전통을 그렇게 중시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창무회의 작품이 곧 선생님의 예술관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내가 대학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우리는 신무용이 전통인 줄 알았어요. 그러다가 6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 전통적인 것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각 분야에서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 당시는 굿 같은 것도 미신이라고 해서 내놓고 할 수가 없던 때인데 나는 대학교 때인 1964년경부터 인사동 굿판을 다녔어요. 김천흥, 한영숙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서 전통춤을 알게 됐고, 60년대 후반에 무형문화재가 만들어져 전통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이화여대 교수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전통 공부를 시작했는데, 송암 스님을 찾아가 불교의식인 작법을 공부했어요. 아침 여섯 시에 절에 올라가면 범패를 먼저 가르쳐, 전통 춤에서 장구를 먼저 가르치듯이, 그다음에 춤을 해요. 몇 년을 배우며 스님과 공연도 함께한 적이 있어요. 요즘에 우리 한국 창작춤이 혼란스러운 이유는 전통을 제대로 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봐요. 한국무용 몸의 틀은 전통이 기본이라고 생각해요. 그 틀이 있어야 서양 현대무용까지도 내 몸속에서 수용할 수 있어요. 초창기 창무회는 이 시대의 한국춤에 대한 사명감이 컸어요. 신무용에 정신적인 것이 결여됐다고 생각한 거죠. 전통춤의 기본 메소드를 익히고, 그다음에 서구적인 것을 받아들여야 용해되어 수용될 수 있다는 개념이 나의 방법론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이론적인 기반도 필요하지요. 이전 한국춤이 예쁘고 손을 많이 쓰니까 우리는 몸 전체를 움직여 보자는, 예쁜 동작 없이 몸 전체로 감정을 전하자는 게 창무회의 춤 특징이에요. 여러 작품을 통해 신무용 시대와 현대 한국무용 시대의 경계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었지요. 현대 한국무용, 이 시대의 무용이 창무회의 몫이라고 생각했어요.

Q. 창무국제무용제가 7월 27일부터 8월 4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과 강원도 화진포 해수욕장 특설무대에서 진행됩니다. 중간에 한두 해 쉬기도 했고, 의정부나 고양에서 행사를 개최하기도 하며 아주 어렵게 지켜온 행사인데, 올해부터는 화려했던 초기 무대가 다시 재연될 법한 소식이 들립니다. 이 행사를 시작한 계기와 초청 단체 선정 기준 같은 것을 말씀해주세요. 올해는 어떤 단체들이 옵니까?

창무국제무용제가 올해로 22년째예요. 이것을 만든 이유는, 세계무용계 조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면서 내 것을 만들어야 된다는 사명감에서 시작했던 거예요. 다른 나라 사람들은 자기네 정신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그래서 첫 회가 부토페스티벌이었어요. 일본의 정신세계로 만들어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망하고 난 시대적 상황에서 만들어진 춤이 부토잖아요. 내 공부를 위해서 국제무용제를 시작한 거예요. 제2회는 유럽의 전위예술, 제3회는 아프리카 춤 등의 테마를 가지고 했어요. 국제무용제가 다국적 단체들을 부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한 나라를 중심으로 전통과 현대가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를 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최근에는 상대적으로 너무 소액을 가지고 행사를 했지만 그래도 내실은 갖췄어요. 물론 해외에서 오는 사람들이 나와의 오랜 친분으로, 내가 부탁하면 자기 나라에서 기금을 만들어서, 정말 친구의 우정으로 온 팀들이 많았지요. 그래서 여태까지 유지가 되어왔고, 그동안의 프로그램을 보면 다 우리가 연구할만한 단체들이었고, 그 덕인지 올해는 국고를 받게 돼서 참 재밌게 준비하고 있어요. 이탈리아, 뉴질랜드, 핀란드, 베트남, 일본에서 참가하는데, 특히 뉴질랜드 팀은 자기네 원주민 전통을 현대화한 작품이 특이해요. 또 이탈리아 팀 경우에는 자기네 전통 악기를 개량했어요. 북 하나로 연주하는데, 나는 그런 걸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일본 부토도 오고, 핀란드 솔로 작품도 자기네 개성이 담겨 재밌고, 이번에는 우리 창무회하고 너무 잘 맞는 단체들이 와요. 이런 재미로 돈이 없어도 빚을 지고 또 갚고 하는데, 이게 마약 같아요. 전생에 내가 남의 돈을 많이 떼먹어서 이생에서 갚는다고 생각해요. 젊은 사람들이 소극장에서 열심히 하는 것만 봐도 너무 좋고, 거기서 좋은 사람이 나오면 막 흥분하고, 우리극장 기획공연 〈드림&비전〉을 통해 나온 지금의 중견들이 박호빈, 정영두, 신창호입니다.
 
Q. 선생님께서는 한국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는데요. 특히 일본에는 한국무용 제자들이 있을 정도로 자주 가셨지요. 일본에서의 활동 내용을 소개해 주세요.

뭘 유명해(웃음), 그냥 좀 자주 갔지요. 일본에서는 정말 여러 가지 좋은 경험을 많이 했고, 97년에 재팬 파운데이션 초청으로 일 년 동안 있으면서 덴쯔사라는 기획사 주최로 이세진구( 태양신궁)에서 공연했어요. 설화에 의하면, 일본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는데 어느 날 해신이 사라졌어요. 춤추는 신이 어둠 속에서 춤을 추다가 옷이 벗겨지니까 여러 신들이 확 웃었다고, 그러니까 해신이 왜 웃나하고 문을 살짝 여는 순간에 모두 달려들어 해가 다시 나왔다는, 한국에서 건너간 공주가 일본에서 춤추는 신이 되었다는 설화의 인상을 내가 재연한 거예요. 그 훨씬 전인 88년도 동경연극제에서도 일본 예술가들과 교류했고요. 일본사람들은 어떤 공연을 하건 예술가 전체가 모여 공유하는 게 달라요. 우리는 무용은 무용하는 사람만 모이는데…. 그래서 음악이나 연극 쪽이나 페스티벌에서 나를 초청하는 계기가 됐어요. 2012년에는 일본 천도 1300년 기념으로 교토 근처 나라에서 큰 행사가 있었는데 내가 유일한 외국인으로 초청받았어요. 퍼커션 연주로 유명한 토시 츠츠토리와 마지막 40분을 함께 공연했어요. 우리나라 백제시대 미마지가 나라의 앵정(櫻井)이란 곳에서 춤과 노래를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토시 츠츠토리가 옛 그림을 보고 미마지의 악기를 재현해 연주하고 나는 미마지를 연상해 춤을 만들었어요. 그 제목이 빛이라는 〈광(光)〉이에요. 우리 백제 사람이 일본에 예술의 빛을 줬다는 의미로 여러 주제 중에서 내가 그 제목을 택했어요.

Q. 유럽과 미국 공연도 자주 하셨지요. 뉴욕 리버사이드와 프랑스 리옹 및 파리 등지의 공연이 기억납니다. 내년 초에도 미국과 프랑스 공연 일정이 잡혔다고 들었습니다.

내년 1월 중순에 프랑스, 2월 말에는 미국 몇 개 도시를 지금 추진 중이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1992년 독일 도이치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했을 때, 독일 사람들이 내 춤을 어떻게 볼까 했는데, 다음 날 베를린모닝포스트에서 내 평생에 최고의 평을 받았어요. 1920년대에 독일이 표현주의를 시작했으면 오늘의 김매자는 너무나 아름답게 그 마무리를 지어가고 있다는 내용이었어요. 뉴욕 데뷔는 1983년, 1982년도에 뉴욕대학 무용과에서 세미나와 공연을 했지만 내 이름을 건 정식 데뷔는 83년 리버사이드 댄스페스티벌이지요. 댄스매거진, 뉴욕타임즈, 빌리지보이스에서 평론가가 왔다는 말을 듣고 춤을 추는데 내 솔로 〈숨〉을 출 수가 없을 정도로 울었어요. 뉴욕 학생들이 중국, 일본, 인도 등지의 춤에 관심이 높았지만 한국춤 교수 김매자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에도 독특한 문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무대 자체가 감동적이었어요. 두 번째 공연날 밤에 한 지인이 뉴욕타임즈를 사서 보라고 전화를 했어요. 잭 앤더슨이 악평을 주로 하는 평론가인데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평을 했다고, 그다음에는 모든 짐을 다 덜어 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Q. 무용은 언제 시작하셨습니까? 평생 무용가로 사셨는데, 무용예술가에게 보람 있는 삶이란 아무래도 자신의 춤과 작품에 대한 애착과 밀접하겠지요?

초등학교 4학년쯤에, 운동회나 학예회에서 선생님이 잘한다고 시켜서 했지요. 그 여파로 중학교 때부터, 그때는 ‘무용가’ 이런 개념이 없었으니 여성국극단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그때부터 춤은 내 일상생활이 되었고, 아프다가도 연습실에 들어서면 안 아파요. 나는 유명한 무용가나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을 절대 하지 않았어요. 그냥 춤이 좋아서, 다른 사람들은 권태기가 있다는데 나한테는 한 번도 없었어요. 요즘도 며칠만 연습을 안 하면 몸이 아픈데, 춤을 계속 추면 안 아파요. 창작도 그래요. 공연 끝나면 허무하잖아요? 그다음부터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해요. 뭔가 찾다가 이미지가 올라오는데 그게 나는 좀 오래 걸려요. 명창 김소희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 88올림픽 끝나고 뭘 하나 같이 하자고 하셨는데, 그것이 나한테는 너무 어려웠고, 십 년이 걸렸어요. 계속 생각하다가 나온 작품이 2001년에 만든 〈심청〉이에요. 선생님과 함께하지 못한 게 너무 안타깝지요. 2012년 〈봄날은 간다〉가 마지막 신작인데, 요즘 주요 창작 지원사업이 ‘창작 산실’이잖아요. 제자들이 많은데 내가 하고 싶다고 낼 수가 없더라고, 그러면 우리 작품은 레퍼토리라도 만들 수 있게 해줘야지요. 내 작품 〈하늘의 눈〉, 〈춤, 그 신명〉이 리옹 비엔날레에 갔다가 다시 메종 드라 당스에 갔잖아요. 그러면서 작품이 다듬어지는데 우리는 그런 기회가 없잖아요. 우리나라는 레퍼토리가 없어 큰일이에요. 〈백조의 호수〉나 〈지젤〉이 처음부터 지금처럼 완벽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Q. 선생님께서 소장하신 자료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에 기증할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언제부터의 어떤 기록들인지 궁금합니다.

영상 자료는 1975년도 것부터 있어요. 비디오가 없을 때니까, 이화여대 시청각실에서 찍은 큰 필름이 있고,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가야금’에는 내가 〈침향무〉를 추는 장면이 나와요. 근데 그 필름을 어떻게 다시 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내가 창무예술원을 지을 때 자료원을 함께 만들고 싶었어요.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자료에 관심이 많았고, 마침 작년에 구술채록을 하면서 내 프로그램, 영상, 사진 등을 기증하겠다고 했어요. 물론 구술을 했으니까 거기 맞는 기록물을 내야 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외국에 나가보면 어딜 가도 우리 자료가 너무나 없어요. 그래서 우선 예술자료원이 많이 소장해야 하고, 한 예술가를 조명하는데 완벽할 수 있는 자료수집이 돼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거기가 자료만 모아두는 창고여서는 안 되고, 학자들에게 활용시킬 수 있어야 해요. 뉴욕대학교 석‧박사과정에서는 현존하는 예술가들을 계속 조명하도록 시키더군요. 그래서 유명 예술인이 더 많지 않은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 <풀 문(Full Moon)>
    〈풀 문(Full Moon)〉
  • <춤, 그 신명>
    〈춤, 그 신명〉
  • <심청>
    〈심청〉


(사진: 창무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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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5.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