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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통신

[영국] 청소년 관람불가 오페라

황정원 (영국 통신원)
  • <귀욤 텔> 공연 장면
    〈귀욤 텔〉 공연 장면


합스부르크 왕가의 압제에 맞서 아들의 머리 위에 사과를 얹고 활시위를 당겼다는 스위스 사람 윌리엄 텔의 설화는 많은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왔다. 19세기 이탈리아 작곡가 조아키노 로시니 역시 그중 하나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오페라로 쉴러의 극 〈빌헬름 텔〉에 기반을 둔 오페라 〈귀욤 텔〉(윌리엄 텔의 불어 발음)을 작곡했다.
혼과 트럼펫의 팡파레에 이어 기마병이 돌진하는 모습을 그린 듯한 윌리엄 텔 서곡은 누구나 한두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막상 이 오페라를 무대에서 만나기 쉽지 않다. 5시간을 넘나드는 긴 공연 시간, 큰 합창단과 발레를 포함하는 작품의 규모, 그리고 역량 있는 배우를 섭외하는 문제 등 제작과정에서 현실적으로 많은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l 20여 년 만에 제작된 오페라, 전례 없는 야유 만나  

로열 오페라 하우스(이하 ROH)는 지난 6월 29일 〈귀욤 텔〉을 20여 년 만에 무대에 선보였다. ROH의 음악감독인 안토니오 파파노가 지휘를, 이탈리아 연출가 다미아노 미켈레토가 연출을 맡았다. 미켈레토는 오페라의 배경을 90년대 보스니아 내전으로 설정했다. 무자비하게 무력을 휘두르는 집단과 그들에게 자유와 문화를 빼앗긴 사람들 사이의 대립, 그리고 이런 갈등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초점이 맞춰졌다. 전반적으로 미니멀한 연출이었지만 동시에 구체적인 사실성 또한 지니고 있었다. 무대 전체에 빼앗긴 조국의 땅을 상징하듯 두꺼운 흙이 깔려져 있고, 등장인물들은 오페라가 진행되는 동안 흙을 움켜쥐거나 몸에 바르며 빼앗긴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을 드러낸다. 또한 뿌리째 뽑힌 거대한 고목 한 그루를 배치하여 뿌리 뽑힌 사람들을 상징하는 한편 무대를 분할하는 등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문제는 3막에 있었다. 무대 한쪽에는 긴 연회 테이블 위로 화려한 샹들리에가 드리워져 있고, 연회를 즐기는 게슬러의 군인들이 보인다. 반대편에는 여성들이 두려움에 떨며 서 있다. 원작에서는 군인들이 복종을 강요하며 여성들에게 강제로 춤을 추게 만드는 장면이다. 대사 없이 로시니의 경쾌하고 즐거운 음악만이 연주되는 이 장면을 미켈레토는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군인들이 한 명의 여성을 끌고 와 희롱하는 것으로 장면은 시작된다. 이어 5분 남짓 동안 군인들은 여인에게 샴페인을 억지로 먹이고, 총으로 협박하거나 치마 속에 손을 넣는 등 점점 수위를 높여 갔다. 급기야 여인의 옷을 전부 벗기고 테이블 위로 눕힌 후 집단 강간을 연출하자, 객석에서는 공연이 진행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건 쓰레기야!”라는 고함 소리 등 큰 야유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일부 관객은 공연 도중 자리를 뜨기도 했다.   

영국의 오페라 관객, 특히 ROH의 오페라 관객은 이탈리아나 독일의 관객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연에 대한 개인의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다. 좋은 작품이나 출연진에게는 조금 크고 긴 박수와 환호를 보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공연 앞에서는 예의상 몇 차례 박수 후 조용히 일찍 좌석에서 일어나는 정도다. 이런 ROH에서 공연 도중 음악이 묻힐 정도로 야유가 나왔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첫 공연이 열린 다음 날부터, 영국의 주요 신문사들과 문화예술 관련 웹사이트, ROH의 웹사이트와 트위터 등에는 벌집을 쑤신 듯 〈귀욤 텔〉에 대한 비판으로 들끓었다. 오페라는 여러 측면에서 오페라를 보거나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전면적으로 공격당했다. 다양한 비판 중 가장 주를 이루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해당 장면이 오페라의 전반적인 흐름에 불필요한 장면이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연출가가 원작자(작곡가)의 의도를 무시한 채 자신의 자아를 드러내기 위해, 혹은 단지 충격을 주기 위해 무대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설립한 세계적인 성악 콩쿨 〈오페라리아〉의 진행을 위해 런던을 찾은 플라시도 도밍고 역시 가디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 사태에 대해 완곡히 안타까움을 표했다.

l 예술적 입장을 고수한 극장

이런 여론에 대해 연출가와 오페라 감독은 연출을 수정할 의도가 전혀 없다고 대응했다. 그러나 동시에 일단의 조치들을 취했는데, 먼저 티켓 구매자들에게 공연 중 나체와 성폭력 장면이 있음을 미리 경고하는 안내문을 보냈다. 또한 이 공연의 티켓을 이미 구매했으나 관람을 원치 않는 관객에게는 ROH의 일반 티켓 정책과 달리 다른 공연이나, 선물권으로 교환 가능하게 임시 조치했다. 마지막으로 ROH의 최고경영자와 음악감독, 오페라 감독의 이름으로 해당 장면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발표했다. 문제가 된 연출은 오페라 대본과 극의 전체적 흐름에 기반을 두고 있어 불필요한 장면이 아닐뿐더러, 전쟁의 참상과 전쟁 중 실제로 여성들에게 일어나는 이런 끔찍한 성폭력을 자각시키는 것이 이 프로덕션의 의도였다는 것이다.
이 프로덕션은 세계 전역의 영화관에서 생중계되었고, 촬영이 있던 날은 배우의 알몸을 식탁보로 감싸는 등 약간의 순화를 거치고, 15세 이상 관람가라는 제한이 주어졌다.(아이러니하게도 공연장에서는 관람 연령제한이 없었다.)

초기의 충격과 격분이 진정되자 차츰 연출을 응원하는 다른 의견들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전쟁 중 폭력은 엄연한 현실이며, 해당 장면은 현실을 반영했을 따름이다, 강간이나 살인, 폭력 등에 대한 사실적 묘사는 오페라가 아닌 다른 장르에 이미 편재하고 있으며, 오페라 역시 시대에 맞는 재해석을 통해 끊임없이 재탄생해야 한다 등의 주장이었다.
오히려 공연 중 격한 반응을 보인 이들에 대해 불쾌함을 표한 관객들도 있었다. 그들의 야유가 극의 흐름을 끊어 다른 관객들의 공연 관람까지 방해했기 때문이다. 또한 야유를 보내던 관객들이 〈귀욤 텔〉 무대에서 연출된 다른 폭력들(주로 살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용인하는 이중 잣대에 대한 비난도 있었다.

l 사회적 용인과 예술의 역할

사실 살인, 특히 여성에 대한 폭력은 오페라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이다. 희생양이 되는 여성들이 죽는 방식도 다양하다. 카르멘은 돈 호세의 칼에 죽고, 토스카는 자신을 겁탈하려던 스카피아의 부하들을 피해 높은 성벽에서 뛰어내려야 했다. 데스데모나는 정절을 의심한 남편 오텔로에게 목 졸려 죽는다. 오빠의 정치적 욕심에 이용당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는 미쳐 죽는다. 그리고 관객은 이들이 죽을 때 큰 박수를 보내는데, 보통 죽기 전 화려한 솔로 아리아가 선보여지기 때문이다.


  • 루벤스: 타르퀴니우스와 루크레티아
    루벤스: 타르퀴니우스와 루크레티아

문제가 된 강간 역시 따지고 보면 오페라사에서 낯선 소재가 아니다. 모차르트의 〈돈 죠반니〉는 돈나 안나가 자신을 겁탈하려는 돈 죠반니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것으로 오페라가 시작된다. 앞서 이야기했듯 토스카 역시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몸을 요구하는 스칼피아 앞에서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부르며 신세 한탄을 해야 했다. 브리튼의 오페라 〈루크레티아의 능욕〉은 루크레티아를 강간하는 타르퀴니우스의 이야기가 오페라 전체를 관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페라라는 장르와 관객들은 유난히 보수적인 편이다. 아름답고 즐거운 경험으로 오페라 관람의 의미를 제한하는 경향이 있으며, 특히 ‘원작자의 의도'에 충실했는지에 민감하다.
해당 장면이 극의 전체적 흐름에 필요한 장치였는지, 단지 자극을 위한 선정적 관음주의였는지에 대한 판단은 결국 관객 개개의 것이다. 그러나 이 오페라가 관객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사회가 용인하는 예술의 영역과 역할에 대한 진지하고 열띤 논의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ROH 역시 지속적으로 홈페이지에 자신들의 의견뿐 아니라 다양한 입장의 관객 의견들을 올리고 그에 대한 반응을 다시 묻는 등 이러한 논의를 반기며 건설적인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ROH 홈페이지에 남겨진 Andy Bass라는 이름의 한 관객의 짧은 감상이 명쾌하게 토론의 주제를 요약해준다.


“Ugly, brutal, very uncomfortable to watch, yes. Gratuitous No”

(추하고, 잔인하고 보기에 매우 불편했나? 그렇다. 불필요했나? 그렇지 않다.)


  • <귀욤 텔> 공연 장면
    〈귀욤 텔〉 공연 장면


(사진: ROH. PHOTOGRAPHER CLIVE BARDA)


[기사입력 : 2015.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