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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왕자와 야수: 예술과 정부에 관한 두 가지 비유

김정수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

문화·예술에 대한 정부 지원의 당위성과 필요성에 대해서는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이론적인 차원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공적 예술지원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를 설명하고 있다. 제도적 차원에서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국가가 문화발전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다는 인식 하에 여러 가지 정책들이 시행되고 있다. 문화·예술의 진흥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과 규모의 지원이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의견의 차이가 생길 수 있겠지만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는 명제 자체에 대해서는 극단적 자유주의자가 아닌 다음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과 정부와의 관계는 어떤 식으로 이해되어야 할까? 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지원이라는 측면에서 정부는 과연 어떠한 존재일까?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정부의 존재의의는 국민의 행복과 공익을 위해 사회의 각종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다. 즉, 공공문제의 해결이 정부 본연의 의무인 것이다. 문화·예술과 정부의 관계를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정부는 문화·예술의 발전을 위한 문제해결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화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주체인 정부는 과연 얼마나 유능한 문제해결자일까?

문화정책 영역에서 정부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두 개의 대조적인 패러다임이 있다. 하나는 ‘왕자 패러다임(Prince Charming Paradigm)’이고 다른 하나는 ‘야수 패러다임(Beast Paradigm)’이다. 이 두 패러다임은 예술과 정부를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와 왕자’ 혹은 ‘미녀와 야수’와 같은 존재로 각각 바라본다. 이 두 시각은 예술에 대해서는 공통된 이미지를 갖고 있으나 정부에 대해서는 대단히 상이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우선 예술에 해당하는 공주 또는 미녀는 항상 예쁘고, 아름답고, 착하고, 고결하고, 우아한 존재이다. 왕자 패러다임에서 상정하는 정부는 마치 ‘백마 탄 왕자’처럼 멋지고, 세련되고, 지혜롭고, 용감하고, 유능한 존재이(어야만 한)다. 그에 비해 야수 패러다임에서 상정하는 정부는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 만큼 흉측하고, 힘세고, 야만스럽고, 거칠고, 투박한 존재이다.

문화정책에 관한 대부분의 논의에서는 정부를 대단히 세련되고 유능한 문제해결자로 바라보거나 혹은 그렇게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문화정책에 대한 학계, 예술계, 혹은 정관계의 토론이나 비판에서 연상되는 정부의 이미지는 마치 ‘백마 탄 왕자’와 같다. 비유로 말하자면 위기에 처한 아리따운 ‘공주’(예술)를 구해내어 평생 행복하고 영화롭게 해줄 수 있는 용감하고 지혜로운 ‘왕자’(정부)라는 것이다. 왕자 패러다임에서는 화려한 수사를 통해 암묵적으로 정부를 매우 합리적이고 전지전능한 존재로 격상시키고 있다. 정부는 바람직한 문화발전 방향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그를 위해 온갖 정책수단들을 동원할 수 있으며, 따라서 문화와 관련된 모든 문제들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가정한다. 요컨대 정부는 문화발전을 확실히 책임질 수 있는, 그리고 마땅히 책임져야 할 능력 있는 해결사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사실 그다지 현실적이지 못하다. 왕자 패러다임에는 몇 가지 기본 전제가 깔려 있다. 첫째, 정부는 문화의 보존과 발전에 대한 무한책임을 가지고 있다. 둘째, 정부는 바람직한 문화발전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그 궁극적인 지향점을 제시해야 한다. 셋째, 정부는 바람직한 문화발전을 성취하기 위한 최선의 방책을 알아낼 수 있고 실행에 옮길 수도 있다. 이처럼 왕자 패러다임은 정부를 완벽한 문제해결자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합리적 의사결정모형과 같은 맥락의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합리적 의사결정 모형이 그러하듯 이 왕자 패러다임 역시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경지를 요구하고 있다. ‘백마 탄 왕자’는 현실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듯이 실제로 정부는 그처럼 완벽한 문제해결 시스템이 아니다. 정부·공공기관의 관료조직은 구체적으로 설정된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데에는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문화·예술처럼 비계량적이고 심미적인 가치를 다루기에는 본질적으로 그리 적합한 시스템이 아니다. 정부에게 문화발전을 책임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마치 체구가 육중한 곰에게 날씬한 발레리나의 섬세한 춤동작을 기대하는 것과도 같다. 한 마디로 불가능한 것을 무리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문화·예술을 위해서는 전혀 쓸모없는 무능하고 무익한 존재라는 것은 아니다. 마치 합리적 의사결정 모형을 비판한다고 해서 인간의 합리성을 전면 부정하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중요한 것은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한계를 분명히 하는 일이다. 정부 관료제는 많은 경우 상당히 쓸만한 문제해결 기구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왕자 패러다임에서 전제하는 바와는 달리 여러모로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야수 패러다임은 정부의 제한된 능력과 책임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비현실적인 왕자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보다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야수 패러다임 시각에서 보는 정부 조직은 매우 불완전한 문제해결 시스템이다. 문화정책에 있어서 정부라는 존재는 마치 〈미녀와 야수〉 이야기에 나오는 야수와도 같다. 동화 속의 야수는 자기 성에 감금된 미녀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고 또 거처할 공간도 제공한다. 그러나 야수는 결코 왕자처럼 세련된 매너를 갖춘 존재는 될 수 없다. 비록 힘은 세지만 투박하고 거칠며 예의와 미적 감각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야수의 특징이다. 이런 야수 같은 정부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야기를 빌어 비유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야수는 아름다운 미녀를 만들어낼 재주는 없다. 미녀의 기준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예쁘게 치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칠만한 심미안도 없다. 야수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저런 옷가지나 장신구 및 화장품 등을 가져다주는 게 전부다. 그러나 그것이 곧 아름다운 미녀를 보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옷을 골라 입고 치장하는 여자의 책임이다. 하지만 야수는 치장에 필요한 물품들을 하나도 주지 않거나 혹은 다 부숴버림으로써 미녀가 되지 못하도록 만들 완력은 있다. 이 경우 아름다운 미녀로 변신하지 못하는 것은 여자의 책임이 아니라 순전히 야수의 탓이다.

왕자 패러다임과는 달리 야수 패러다임에서는 정부의 ‘제한된 능력과 제한된 책임’을 전제로 문화정책에 접근한다. 기본적으로 정부는 바람직한 혹은 좋은 문화·예술이 어떤 것인지 판정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인 것으로 본다. 문화란 가치의 영역이고 가치판단은 근본적으로 개개인의 주관적 평가의 대상이다. 따라서 정부가 모든 시민을 대표하여 바람직한 문화·예술의 지향점을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러할 권한도 없다.

또한 정부는 문화·예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즉, 무엇이 문화발전이고 그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권력은 문화발전을 억누르고 저해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막강하다. 비유하자면 야수는 어떤 씨앗이 어떤 예쁜 꽃이 되는지도 모르고 또 어떻게 하면 꽃이 잘 자라나는지 알지 못하지만 발로 짓밟거나 바위를 던짐으로써 꽃을 죽여 버릴 수는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야수 패러다임에서는 무엇이 문화 ‘파괴’이고 어떻게 하면 문화가 ‘쇠퇴’될 수 있는가에 더 초점을 맞춘다. 다시 말해서 아름다운 문화의 꽃을 피우기 위해 정부가 노력한다는 적극적인 자세보다 꽃이 피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치워준다는 다소 소극적인 자세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처럼 야수 패러다임에서는 문화정책의 목표로 직접적인 문화발전의 추구보다는 문화발전을 저해하는 요인들의 제거를 더 강조한다. 그렇다면 만약 정부가 그러한 장애물들을 치워주면 과연 문화융성과 예술진흥이 이루어질 것인가? 사실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우리나라에서 과거 문화정책이 주로 체제유지 및 정권홍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적도 있었다. 문화와 예술 그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은 각종 규제와 제약들이 버거운 족쇄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걷어준다고 해서 곧 문화가 발전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물론 문화발전의 걸림돌을 제거하는 것은 정부의 당연한 역할이다. 그런데 거기까지가 정부책임의 한계이다. 그 이상은 정부 입장에서 책임질 문제도 아니고 또 그럴만한 능력도 없다. 사실 모든 사회문제의 해결이 다 정부의 책임인 것은 아니다. 적어도 문화정책의 경우, 정부는 쓸데없는 훼방만 놓지 않으면, 그리고 걸리적거리는 돌들을 치워주고 뛰어놀 멍석만 깔아주면 그로써 할 일은 다한 것이다.

필자의 생각을 비유로 마무리한다. 문화·예술과 정부의 관계는 ‘백설공주’와 ‘백마 탄 왕자’의 관계라기보다는 차라리 ‘미녀와 야수’의 관계에 더 가깝다. 야수의 투박한 손길과 무딘 감성으로 아름다운 미녀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야단치거나 설교한다고 해서 혹은 직접 꾸며준다고 해서 미녀가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야수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은 그녀가 마음껏 치장할 수 있도록 봉사하는 것이다. 과연 그 미녀가 다른 이들의 눈에도 아름답게 비칠 것인지는 야수가 책임질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그녀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 이 글은 필자의 논문 ‘미녀와 야수: 문화행정의 새로운 패러다임 모색’(「한국행정연구」, 11:1, 2002)의 주장 중 일부를 재정리한 것임.


김정수
김정수

고려대 법과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Yale University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고려대 공공행정학부에 재직하였으며 현재는 한양대 정책과학대학 행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문화정책학회 창립이사, 한국정책학회 편집위원장, 문화체육관광부 자체평가위원, 공공기관 경영평가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주요 관심분야는 문화정책과 정책이론이다. 주요 저서로는 〈문화행정론:이론적 기반과 정책적 과제〉(학술원 우수도서 선정), 〈스크린쿼터의 추억:한국영화 의무상영제도 변천사〉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스크린쿼터와 딴따라:대중문화에 대한 정부개입과 문화산업경쟁력에 관한 시론’, ‘미녀와 야수:문화행정의 새로운 패러다임 모색’, ‘불확실성, 결정오차, 그리고 제비뽑기의 역설:문예진흥기금 지원심의방식에 대한 역발상’, ‘문화생산의 글로벌화에 따른 새로운 문화정책 패러다임의 모색:우리나라 영화산업의 사례를 중심으로’, ‘(신)한류에서 배우는 문화정책의 교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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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5.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