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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예술, 예술을 넘어, 다시 예술
2015 페스티벌 봄(Festival Bo:m)의 질문과 과제

이경미 (연극평론가)
  • 이보 딤체프의 <아이-큐어>
    이보 딤체프의 〈아이-큐어〉
  • 이희문의 <쾌>
    이희문의 〈쾌〉
  • 쉬쉬팝의 <서랍>
    쉬쉬팝의 〈서랍〉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예술에 반(反)하는 것이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재현에 대한 담론이 힘을 잃으면서 예술의 중심이 창작자가 아닌 수용자로 옮겨간 이후, 예술을 한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 되었다. 수용자가 그 안에서 자신이 동의할 수 있는 미학적 바탕을 발견하지 않는 한, 그 예술은 결국 창작자의 공허한 자기욕망 내지는 이상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것이 다 예술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예술을 끊임없이 예술이게 하는 힘 또한, 바로 이 쉽게 합의될 수 없는 중간지대로부터 발생한다. 예술은 여전히 경계를 탐색 중이고 이제 관객 또한 그 탐색에 웬만큼은 동의해가고 있다.  

l 새롭거나 낯설거나, 즐겁거나 당혹스럽거나

언제부터인가 '다원(Dawon)'이 동시대성과 동의어로 통하고 있긴 하지만, 솔직히 그 범주에 대해서는 합의된 것이 없다. 그러다 보니 간혹 동의할 수 없는 모호한 시도들이 유령처럼 그 주변을 부유하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최근 1-2년 사이 페스티벌 봄이 언급하는 ‘다원’의 지형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는 듯하다. 올해 페스티벌 봄에는 총 11개국에서 50여 명의 아티스트가 참가하여 약 30여 편의 작품을 선보였다. 전체적으로 각각의 작품들의 수는 많아지고 규모는 작아졌다. 아울러 스트리트 컬쳐, 오타쿠 문화, 웹툰과 마술처럼 여전히 예술로부터 생경한 영역들과의 교류를 시도하면서, 예술 간의 경계는 물론이고,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 또한 적극 지워버렸다. 예술과 일상이 혼재하고, 행위하는 자와 보는 자의 구분 또한 존재하지 않는 올해의 이 무중력의 공간 속에서, 어떤 작품은 새로웠고, 어떤 작품은 당혹스러웠으며, 또 어떤 작품은 놀랍기도, 그리고 건조하기도 했다.
불가리아 출신의 이보 딤체프(Ivo Dimchev)의 〈아이-큐어(I-Cure)〉는 건강함과 치유라는 화두를 가지고, 실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모든 편견에 대해 질문하는 공연이다. 이보는 이 깨달음의 제단에 자신을 기꺼이 희생 제물로 바친다. 짙푸른 바닷가 해변에서부터 난로 속의 타오르는 불빛,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수와 초원을 달리는 표범까지, 이보는 텔레비전 화면 속의 온갖 건강함과 생명, 활기와 쾌락을 몸으로 만끽한다. 비키니 수영복 차림으로 온몸에 선크림을 바르는가 하면, 관객을 불러 안마를 청하기도 하고, 악기를 연주하기도 한다. 건강함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점점 더 넓어지면, 그 상상력으로 뭐든지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렇게 점점 고조되는 그의 엑스터시는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오럴섹스에서 그 정점을 찍는다. 그리고는 다시 관점만 달리하면 똥에서도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고, 치유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고 되묻는다. 그러나 이처럼 그의 몸이 더없는 환희의 상황 속으로 몰입해 갈수록, 관객이 심리적으로 느끼는 이질감은 커져간다. 건강함을 이야기하며 자신을 치유의 매개체로 제시하지만, 정작 관객에게 보여지는 그의 몸은 보기에 불편하고, 그의 행위는 관객에게 익숙한 정상의 정도로부터 일탈하기를 거듭하기 때문이다. 건강을 건강하지 않은 방식으로 얘기하면서 건강과 건강하지 않음 사이의 경계를 지목하는 것이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한 것, 아름답고 유쾌하지 못한 것 너머로 사라진 것들의 존재를 환기시킨다. 작게는 지금 극장 안, 관객의 시선 속에 불편하게 갇혀 있는 자신의 몸, 그리고 처참하게 살해된 텔레비전 화면 속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모습까지. 이보는 그렇게 자신을 직접 드러내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남김없이 소진시키면서 예술과 아름다움, 그리고 건강함으로 통하는 모든 상식들 안에 도사린 편견에 대한 재분할을 시도한다. 건강함과 치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편견을 깬 자리에서 새롭게 발견하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그런가 하면 이보 딤체프와 달리 보리스 샤르마츠(Boris Charmatz)는 그의 맨몸을 온전히 ‘춤’의 제단에 바쳤다. 무대를 채운 것은 음악도 조명도 벗어버린 그의 코르푸스(corpus)다. 그것은 춤에 대해 사유하고 질문하며 춤을 다시 쓰는 하나의 수행적 기표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도 그 방식이 실로 거침이 없다. 샤르마츠는 이 공연에서 자신의 성기를 춤의 언어의 일부로 수렴시키기 보다, 오히려 그것을 또 다른 살로, 물질로 도드라지게 현시한다. 자신의 성기를 마치 신체 다른 부위의 피부처럼, 조직처럼 움켜쥐고 비틂으로써, 샤르마츠는 그때까지 무대를 응시하던 관객의 시선을 노골적으로 배반한다. 이로 인해 관객은 ‘본다’라는 자신의 행위를 어디까지 확장시키고 또 거둬야 할 것인지를 놓고 당혹스러워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모든 춤의 바탕이 되었던 아름다움과 숭고, 교감의 명제가 그마저도 무너지는 순간이다. 결국 샤르마츠는 객석을 향해 선 채로 방뇨하는 것으로 50여 분의 공연을 끝내고 무대 뒤로 사라진다. 그러나 거기까지. 무용의 관습에 대한 그의 도발은 이전의 그의 공연들, 그리고 현재 다른 무용의 그것에서 그닥 멀리 나가지 않는다.  
이희문이란 광대를 만난 것은 그 자체로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예술, 그것도 우리의 전통예술 특유의 엄숙주의를 한 방에 날려버린 이 통쾌한 시도는 음악평론가 송현민이 말한 것처럼, 오히려 “민요에 내재된 원형적 재미와 그것을 즐기는 방식”을 완벽하게 되살려낸 것이었다. 장영규에 의해 현란한 디스코 풍의 음악으로 탄생한 민요 가락이, 기이한 가발에 촌스러운 망사 스타킹, 반짝이 드레스에 입이 딱 벌어질 만큼 높은 하이힐을 신고, 현란한 조명에 맞춰 값싸게 몸을 흔들어대는 안은미 특유의 몸짓과 만난다. 이 접점 위에서 이희문과 신승태, 추다혜는 광대로서의 그들의 역할을 기막히게 수행한다. 대중문화 공간의 온갖 레이디 메이드 코드들은 싸구려의 극한을 달리는데, 이것이 전통의 정서와 기막히게 어우러져 새로운 제의성을 탄생시킨다. 
               
콜렉티브 퍼포먼스 내지 다큐멘터리 연극을 대표하는 쉬쉬팝(SheShePop)의 〈서랍〉은 동·서독 출신의 여배우 6명이 자신의 개인적 연대기를 통해 독일의 분단과 통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는 이들의 시간 속에 남겨진 기록과 기억 위로 분단의 흔적과 통일의 흔적이, 여전히 극복되지 못한 간극들의 흔적이 수시로 교차한다. 이야기는 수시로 중단되고, 대화의 내용은 엇나가며, 그러는 사이 상대에 대한 끝없는 탐색과 일방적인 자기 판단이 오간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대화하려는 시도만큼은 절대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 개의 테이블에 서로 위치를 바꿔 마주하지만, 절대 자신들이 앉은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테이블과 의자, 그것은 아직도 진행 중인 독일의 통일을 지탱하는 힘과 인내를 상징한다. 


  • (사진: 페스티벌 봄)

    (사진: 페스티벌 봄)

l 로컬, 컨템포러리 그리고 상호참조 : 아직은 모색 중

‘페스티벌 봄’을 반기는 이유는, 예술의 동시대성에 대한 고민, 즉 시대와 인간, 그리고 예술에 대해 진정성 있게 다가서기 위한 진지한 고민의 흔적들을 발견하고 공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형식과 규모, 장르의 구분을 떠나, 한 예술가의 진지하고 치열한 문제의식이 어떻게,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는지를 발견하는 즐거움은 꽤 큰 것이다. 올해 페스티벌 봄의 주제는 “로컬 컨템포러리(local contemporaneity)”와 “상호참조(Cross-reference)”다. 아시아 및 한국이라는 지역성을 강조하고, 검증된 작품 이전에 실험적인 작품에 보다 주목하며, 이들을 위한 소통의 공간을 마련하려는 예술감독(이승효)의 기획 의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컨템포러리가 여전히 유럽을 기준으로 논의되고 있음을 상기한다면, 유럽 이외의 지역, 특히 아시아와 한국의 컨템포러리에 대한 독자적 담론을 찾는 일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페스티벌 봄이 모색하고 있는 이 시도들은, 아직 좀 더 내부적인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우선 참가한 작품의 수가 지나치게 많았고, 작품들 간의 편차는 여전히, 아니 더 커졌다. 특히 유럽의 몇몇 아티스트들이나 이희문의 작품처럼 이미 발표된 작품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기획 공연들은 정작 그 울림이 작았다. ‘로컬’의 화두를 진지하게 열어 동시대적 맥락과 연결하고자 하는 올해 페스티벌 봄의 시도는, 기획 의도에 비해 그것을 채울 콘텐츠를 발견하지 못했거나, 있어도 부족했던 탓에 결국 모색 내지 탐색에 머문 듯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안정을 원하는 이들은 절대로 자처해서 최전선에 서지 않는다. 무엇보다 페스티벌 봄은 내년에도 또 최전선에 자처하고 자리를 잡을 것이다. 더디고 미약하지만 바로 이런 지속적인 탐색이 쌓이고 쌓여 결국 그것이 예술을 다시 쓰고 논하는 동인이 되었음을 알기에, 다시 기대하고 기다려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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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5.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