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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현대미술에서 다루어지는 회화의 위상과 위치
《마크 로스코》전과 《그림/그림자》전의 의미

박준수 (미술평론가)
  • 《그림/그림자》전
    《그림/그림자》전
  • 데이나 슈츠의 <싱어 송라이터>, 2013
    데이나 슈츠의 〈싱어 송라이터〉, 2013
  • 질리언 카네기의 <섹션>, 2013
    질리언 카네기의 〈섹션〉, 2013


2015년 전반기 우리 미술계에는 두 개의 주목할 만한 회화 전시가 열렸다. 20세기 중반 미국을 대표하는 추상표현주의의 슈퍼스타 《마크 로스코》의 전시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렸으며,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열린 《그림/그림자》전은 막 전시를 끝마쳤다. 이 두 회화 전시를 함께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표현은 “회화의 죽음”이다. 한 전시는 회화의 죽음이 있기 이전 마지막 생존자라는 점에서, 다른 하나는 회화의 복권을 시도하는 동시대 화가들의 전시라는 점에서 이들은 회화의 죽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1950~60년대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미술비평가들 중 하나인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년)는 (폭력적이게도) 회화의 죽음을 선고하였다. 역사적으로 회화는 몇 차례의 위기들을 겪어왔다.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그에 따라 매체가 다양해지며 2차원의 평면에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회화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듯 보이기도 하였다. 다게르(Louis-Jacques-Mandé Daguerre, 1787~1851년)에 의해 최초의 실용적 사진술이 개발되며 재현적 회화가 위협을 받았던 1800년대 초·중반이 그러했고, 뉴 미디어나 설치미술 등이 강세를 보이던 1900년대 중·후반이 그러했다. 1800년대의 위기는 인상주의의 등장과 함께 비교적 빠르게 극복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1950년대 그린버그가 진단한 회화의 죽음은 꽤나 오랜 기간 지속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사진이나 비디오, 설치미술과 뉴미디어 등 새로운 매체들의 등장에 의한 위협은 외부적인 요소들에 의해 회화의 영역을 침범받았던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1950년대를 마지막으로 한 회화의 죽음은 회화의 내적 논리가 붕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매체의 본질적 특성으로 환원해야 한다는 그린버그식의 모더니즘은 회화의 평면성에 주목하였다. 칸트의 자기비판(Self-criticism)을 수용한 그린버그의 접근은 미술장르가 서로 다른, 매체에 따른 본질적인 특성을 주장하였고, 회화에 있어서 그 본질적 특성은 평면성이었다. 그에 의하면 회화는 회화만의 평면적 특징을 보여 주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하며, 이러한 움직임은 마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린버그는 마네의 작품은 실제 현실을 재현(representative)하여 3차원의 공간을 표현하고 있지만, 캔버스 내부에 표현된 형태들이 캔버스의 평면적인 형태를 따르기 시작한, 모더니즘 회화이자 최초의 아방가르드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회화는 점차 재현적 특성이 사라지고, 추상의 형태로 나아가며, 캔버스의 평면 자체를 나타내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1950년대의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년)은 캔버스 전체에 물감을 균일하게 흩뿌리는 올-오버 페인팅(all-over painting)으로 최고의 작가라고 평가받았다. 사각형의 캔버스 내에서 어느 곳에도 비중을 두지 않으며, 아무 곳에도 포커스를 두지 않은 폴록의 작품은 캔버스의 평면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폴록이 다시 재현적 회화로 회귀한 이후, 그린버그는 그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이상에 걸맞은 또 다른 스타들을 찾게 되었다.


  • 《마크 로스코》전
    《마크 로스코》전
  • 〈무제〉,
    〈무제〉, 1970
  • 〈무제〉, 1962
    〈무제〉, 1962

그린버그가 회화의 죽음을 선고하기 직전, 회화의 정점이라고 평가한 세 명의 작가들 중 한 명이 마크 로스코이다. 로스코와 바넷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년), 클리포드 스틸(Clyfford Still, 1904~1980년)을 1950~60년대 가장 위대한 미술가들이라 평가한 그린버그의 서술은 실제로 이 세 작가들의 미술사적 위상을 드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팝아트가 등장하며, 작가의 위치는 아우라를 지닌 창조자에서 생산자로 변화하였다. 그린버그는 19세기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년)와 함께 인상주의에서 시작된 회화의 미술사적 발전이 1960년대 초반 회화의 죽음으로 인해 끝났다고 평가하였다. 작가의 행위와 창조성에 너무 커다란 중요성이 부여되는 경향에 반발하는 미술계의 움직임은 팝아트, 미니멀리즘 등의 등장과 함께 작가 개인의 예술적 아우라를 걷어내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되었으며, 그린버그는 이와 함께 회화의 사망을 선고하게 되었다. 이후 작가의 역할 영역이 확장되고, 이에 따라 수많은 가능성이 열리며 미술의 영역은 보다 다양해지고 확대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발전을 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그린버그가 말한 회화의 죽음은 이제 허상과도 같은 말이 되었으나, 회화 장르의 내부에서 보았을 때, 회화의 죽음은 어느 정도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수많은 매체들이 나타나고 발전하고 있으나, 회화만은 화가의 붓질에 의해 처음부터 끝까지 창조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적 굴레를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이러한 모더니즘적 회화의 정점이라고 하는 로스코의 전시가 현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로스코의 전 시대에 걸친 작품들을 한 번에 조망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미국 워싱턴의 내셔널갤러리에서 작품들을 최대 규모로 방출하였다는 점만으로도 한가람미술관의 이번 전시는 기대해볼 만하지만, 다소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전시장의 여백을 허용하지 않는 듯 벽면을 가득 채운 로스코의 말들까지는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객관적인 ‘사료’들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작품 옆에 붙어있는 해설들과 여러 명사들의 극찬,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로스코”와 같은 전시 광고문의 서술은 로스코의 작품을 감상하는데 그다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아 보인다. 수많은 추상회화들 중에서도 작품의 텅 빈 공간들, 여백을 통해 자신을 투영하고, (이것이 작가가 의도한 바가 아닐지라도) 그 앞에서 관람객이 감동하고 눈물을 흘리는 경험은 온전히 자신과 작품 사이에서 일어나는 교감이다. 그러나 “관객과 내 작품 사이에 아무것도 있지 말아야 한다”는 로스코의 당부는 작품과 관람객을 둘러싼 수많은 시장의 우상들에 의해 빛이 바랜다. 그럼에도 로스코가 지니는 미술사적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한가람미술관의 전시는 그 자체만으로도 관람할 만한 가치가 있다.

역사적으로 위기를 겪어온 회화는 미술의 영역에서 자신의 자리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선언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어왔다. 미술의 장르들 중 가장 오래된 매체들 중의 하나인 회화는 1980년대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신표현주의처럼 아직도 자신의 건재함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 “‘회화의 기원’으로 돌아가 매체의 본질을 성찰하고자 했다”는 《그림/그림자》전의 전시소개는 회화가 매체의 본질적 특성이라는 모더니즘적 견해를 벗어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 에둘러 보여주는 듯하다. 그럼에도 작가의 붓질이 작품에 켜켜이 쌓이는 회화의 특성은 작품이 존재하는 순간(presentness)에 방점을 두는 그린버그적 견해에서 나아가 시간의 감각에 대한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역사적 회화들의 재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물감의 물질성(materiality)에 주목하는 등 다양한 가능성을 여는 오늘날의 회화 작가들은 매체의 확장을 위한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다. 신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최초의 회화가 등장했을 때부터 현재까지 내려오는 역사에 비하면, 회화의 위기는 길어야 최근 50년에 불과하다.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찰나의 위기를 겪어온 회화의 오늘날이 어떠한 방향성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는 《그림/그림자》 전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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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5.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