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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페르시아의 정원에서 길을 묻다
1부 - 꽃을 든 남자 거기 있었네

박찬순 (소설가)
  • 눈 덮인 테헤란의 토찰 산
    눈 덮인 테헤란의 토찰 산
  • 목 타는 사막
    목 타는 사막
  • 다리우스 대왕의 부조(페르세폴리스)
    다리우스 대왕의 부조(페르세폴리스)


모두들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교민들도 테헤란 시민들도. 또 저러다 깨지는 거겠지, 하고 무관심한 듯 굴었다. 나는 혼자서 속을 끓였다. BBC 월드 채널을 틀어놓고 매시간 뉴스를 확인했다. 그러다가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내가 왜 이다지도 남의 나라 일에 안달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란이 대체 내게 무엇이기에, 어떤 나라이기에, 그들에게 내려진 온갖 경제며 정치적인 제재가 풀리기를 그토록 소망하고 있는 것일까. 거기에 대한 대답은 어쩌면 ‘꽃을 든 남자’에게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꽃을 든 남자.’     
사실 테헤란 레지던스 작가를 지원하게 된 것도 ‘꽃을 든 남자’ 때문이었다. 때문이라는 말은 잘못이다. 덕분이라고 해야 옳다. 몇 년 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부산 영화제에 왔을 때 기자가 물었다. 감독이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고. 그가 대답했다.   
 “감독이란 ‘꽃을 파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때 ‘꽃을 파는 사람’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영화를 꼼꼼하게 다시 보았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올리브 나무 사이로’,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체리의 맛’, 클로즈업 등. 몇 번을 보고서야 공통점을 찾아냈다. 영화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품이 있었다. 바로 ‘꽃’이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라지 못하는 불모의 민둥산,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고원과 사막, 그러나 그 시골 마을의 집집마다 베란다에 꽃을 길렀고, 누군가는 꼭 화분에 물을 주거나 그것을 품에 안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테헤란에 온 뒤에는 꽃을 든 남자의 기원을 고고학 박물관에서 찾을 수 있었다. 수천 년 된 페르시아의 유물들을 훑어보던 중에 눈에 확 들어오는 부조가 있었다. 페르세폴리스에서 가져온 그 부조의 주인공은 곧 꽃을 든 남자, 아니 꽃을 든 황제, 다리우스였다. 2,500년 전에 이미 광대한 제국을 다스릴 행정조직을 만들고, 교통로를 건설했으며 화폐를 주조하고 무엇보다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건설한 아케메네스 시대의 왕이었다. 다리우스는 오른손에는 왕권의 상징인 긴 홀(笏)을, 왼손에는 연꽃을 들고 외국의 사신들을 맞고 있었다. 키아로스타미의 ‘꽃을 파는 남자’와 ‘꽃을 든 황제’는 이렇게 해서 뭔가 서로 연결이 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다리우스는 재임기간 중 정복지를 다스릴 때 ‘관용’을 첫 번째 원칙으로 정했다고 역사책에 나와 있었다. 타민족의 종교를 존중했으며 심지어 유대인 노예들을 풀어주고 예루살렘에 그들의 신전을 짓도록 허락하고 재건 비용도 지원했다.
꽃을 든 남자의 모습은 오직 그 뿐이 아니었다. 카펫 박물관에서 나는 또다시 그를 만났다. ‘사계’라는 제목의 타브리즈 산 대형 카펫 한가운데에 꽃을 들고 있는 다리우스 왕을 찾아낸 거였다.
꽃 때문에 놀란 적은 그뿐이 아니었다. 어느 학생의 집에 초대 받았을 때 나는 꽃을 사서 갔다. 학생의 어머니가 말했다. ‘호데툰 골리.’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내게 학생이 웃으면서 알려주었다. ‘당신이 꽃’이라는 뜻이라고. ‘꽃인 당신이 우리 집에 왔으니 꽃은 따로 사올 필요가 없다’는 얘기였다. 어떤 교민은 이런 표현이 이란 특유의 과장법인 ‘터로프’라며 듣기가 좀 거북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의문이 들었다. 그 말을 왜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까, 하고. 이 세상 어느 나라 민족이 손님에게 ‘당신은 꽃’이라고 부를까.
페르시아의 꽃 말고도 내가 이 회담의 행방에 대해 그토록 마음을 졸인 이유가 있었다. 테헤란에 와서 만난 많은 젊은이들에게서 느낀 짠한 감정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조국에 내려진 갖가지 제재로 해서 장래가 꽉 막혀있다고 한숨지었다. ‘우리에겐 미래가 없어요. 캄캄할 뿐이죠.’ 만나는 학생들마다 서슴지 않고 말했다. 서방의 오랜 제재는 청년들의 삶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어느 청년은 교사 봉급으로는 가족을 부양할 수 없어 택시 기사로 일하면서 쉬는 날엔 다섯 가지 아르바이트를 뛰고 있었다. 단지 ‘이란인’이라는 이유로 해외 취업의 길도 막혀버렸다고 했다. ‘비자도 받을 수 없어요. 불법체류자라는 평판이 나 있으니까요.’ 테헤란 청년들은 3포 시대를 겪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취업 포기, 결혼 포기, 내 집 마련 포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였다.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인 디아스포라가 4, 5백만 명에 이른다는 뉴스를 들은 기억도 났다. 이제는 그 누구도 더 이상 이들의 충정 어린 근심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강한 느낌이 왔다.   
드디어 4월 3일 오후, 회담 결과가 발표되었다. BBC에서 ‘포괄적인 핵 협상에서 이란과 정치적인 큰 틀의 합의’라는 뉴스를 접하는 순간 나는 말 못할 감회에 젖어들었다. 앞이 캄캄하다던 청년들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당장 그들을 만나 건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카톡으로 축하를 보냈다. 학생들은 공항에 도착하는 자리프 외무장관을 마중 나가 환호성을 질렀다. 지도자가 이토록 환영받는 일은 이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했다.
시민들의 환호는 ‘핵무기보다 민생’임을 웅변으로 말하고 있었다. 맺힌 것을 풀고 막힌 것을 뚫는 것이 시대정신임을. 나는 세계사의 전환점을 현장에서 보는 느낌이었다. 처음 올 때의 그 팽배했던 불안감은 마침내 오늘을 보기 위한 진통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l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그동안 ‘이란’ 하면 얼핏 듣기에도 뭔가 으스스하고 위험하다는 느낌을 주는 나라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와 하이얌의 시로 알고 있는 이란은 결코 그렇게 함부로 단정할 나라가 아니었다. 나는 이란에 대한 모든 편견과 왜곡된 정보로부터 벗어나 이 나라의 참모습을 직접 내 눈으로 새롭게 발견하고 싶었다.  
지도에서 찾아낸 이란은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숙녀의 옆모습을 닮아 있었다. 이마에는 카스피 해를 쓰고, 턱밑으로는 페르시아 만을 끼고 있는, 모자 쓴 숙녀의 옆모습. 면적은 한반도의 7.5배, 그곳에 남북한 인구를 합한 수와 비슷한 7,800만 명이 살고 있었다.
기름값이 싼 덕분인지 시민들은 너도나도 차를 몰았다. 왕정시대에 인구 400만에, 중동의 파리를 꿈꾸었던 테헤란은 이제 1,300만 명이 넘는 거대 도시가 되어 있었다. 자동차가 거리를 점령하고 있는 탓에 집 밖으로 나오면 목이 아플 정도로 대기 오염이 극심했다. 그러나 국토가 넓은 덕분에 농산물이 풍부하고 유제품이 많아 식생활은 매우 풍요로워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여행안내서 론리 플래닛의 지적에 공감하게 되었다. ‘정부의 강력한 통제 덕분에 치안은 확실히 안전하고, 테러 위험 같은 것은 거의 없다. 위험한 것이 있다면 심한 대기오염과 거친 자동차 문화이다.’    
어느 날 숙소 근처인 샤리아티 거리를 산책하다가 북쪽에서 4월인데도 아직 흰 눈을 이고 있는 산봉우리를 발견했다. 그야말로 테헤란의 명물이라 할만 했다. 도심에서 30분도 되지 않는 곳에 눈 쌓인 산봉우리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인 듯했다. 토찰이라는 산이었는데 스키장이 5월 초까지 운영된다고 했다. 테헤란은 해발 1,600미터나 되는 고원 지대에 자리 잡은 도시였다.
이튿날 아침 일찍 나는 무작정 눈 쌓인 토찰로 달려갔고 거기서 마침 대입 수능 공부를 하던 중에 잠시 머리를 식히러 나온 여고 4년생들을 만났다. 여학생들은 우르르 달려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내가 ‘코레’라고 했더니 한 여학생이 휴대폰을 열어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이민호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내 손을 잡고 한참을 동동 뛰었다. 나는 그들과 눈밭에서 엉덩이로 눈썰매를 타고 눈싸움을 하며 여고시절로 다시 돌아간 듯 테헤란의 하루를 마음껏 즐겼다.      
이란에서 내가 발견한 가장 큰 보물이라면 7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문화유산도, 석유도, 그 어떤 것도 아닌 곧 ‘사람들’이었다. 손님을 맞는 시민들은 한결같이 친절했으며, 특히 학생들은 어디에서 만나든 이방인을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옛날 제국을 경험했던 페르시아의 후손들이어서일까. 그들은 길을 묻는 내게 세세한 골목까지 자상하게 가르쳐 주거나 아예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었다.
산에서 만난 학생들은 처음 만난 내게 함께 점심을 먹자고 제안했고 자신들이 사야 한다고 우겼다. 테헤란에 온 손님은 반드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외국인에게 이토록 환대를 베풀도록 만드는 것일까. 한 여학생이 말했다. ‘이란인 사이에 있을 땐 아무도 외롭지 않아요.’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얻어먹고 나서 나는 그녀의 말을 패러디했다. ‘이란인들 사이에 있을 땐 아무도 배고프지 않아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헤어질 때 한 여학생이 내 손을 잡고 말했다.’ 돌아가면 꼭 전해 주세요. ‘우리, 나쁜 사람들 아니라고요.’ 여고생들까지도 나라의 이미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여고생들도 그랬지만 이란 사람들의 과도한 한국 선호에 나는 적지 않은 부담감을 느꼈다. 어쩌면 한국 기업이나 케이팝, 드라마 때문에 생겨난 일종의 환상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한국에 유학 가겠다.’, ‘한국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 ‘한국에 가서 사는 게 꿈이다.’ 와 같은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한국에 대한 찬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반론을 제기해야만 되었다. ‘한국에도 문제가 많다. 살아보지 않아서 그렇지.’라고 해도 그들은 곧이듣지 않고 도리어 두둔하고 나섰다. ‘문제가 있는 것을 알면 재빠르게 고쳐나가는 나라잖아요. 그게 중요한 거죠.’ 나는 혼자 자문할 뿐이었다. ‘정말 그렇던가?’  

l 목 타는 사막을 살아 본 자만이   

원래 혼자서 지방 여행을 할 계획이었지만 마침 한국에서 온 팀이 있어 그들과 합류해 남쪽으로 떠났다. 버스를 타고 커션, 이스파한, 야즈드를 거쳐 시라즈로 가는 여정이었다. 테헤란을 벗어나면서부터 끝없는 사막의 연속이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우리가 해발 1,500에서 5,000미터에 이르는 이란 고원을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차창 밖으로 자그로스 산맥이 출렁거리면서 우리의 여정을 계속 따라왔다. 그 밑으로는 사막이 펼쳐졌다.
버스로 하루에 일곱 여덟 시간을 달리는 동안 나도 사막처럼 목이 타왔다. 나무 한 그루 폴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사막에서는 작은 마을이나 도시가 곧 오아시스인 셈이었다. 마을마다 나무를 심고, 분수를 만들고 꽃을 심어 두었다. 문득 푸른색 바탕에 꽃무늬로 이루어진 이란만의 독특한 색깔과 무늬로 이루어진 모스크가 생각났다. 주변이 온통 사막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살다 보니 그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바로 그런 곳인가 보았다.
옛날에는 죄인을 사막에 혼자 떨어뜨려 놓았다는 얘기도 있었다. 저 드넓은 고원과 사막에 놓인 한 인간을 그려보았다. 외롭고 연약하기 그지없는, 강렬한 태양에 금세 타버릴 것 같은 한 포기의 풀, 한 마리의 여린 짐승에 다름 아니었다. 사막은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모든 생물들뿐 아니라 그것을 보고 있는 여행자의 애간장도 타게 만들었다.
사막을 거쳐 도착한 이스파한은 그야말로 오아시스였다. 16세기, 압바스 왕이 ‘세계의 절반’이라고 불렀던 옛 왕궁에 들어서자 전형적인 페르시아의 정원이 나왔다. 한가운데에 직사각형의 연못이 있고 주위에 꽃과 나무를 심어놓았다. 수면 위로 우람한 나무들과 아름다운 꽃 그림자가 그림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그랬다. 사막을 살아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불모의 모래땅에서는 오로지 생명을 품고 가꾸는 일만이 절실할 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오직 생명, 그뿐〉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제목처럼 페르시아의 정원은 삶의 길을 묻는 우리에게 그 답을 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 테헤란 여고생들
    테헤란 여고생들
  • 황토집과 여인들
    황토집과 여인들
  • 자리프 외무장관 도착에 환호하는 테헤란 시민들
    자리프 외무장관 도착에 환호하는 테헤란 시민들


아르코 로고

[기사입력 : 2015.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