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지난해 김중식 대사관 홍보관의 주선으로 한국 시인협회와 교류협약을 맺은 ‘이란 시인의 사회’가 다행히 숙소에서 가까운 돌랏 스트리트에 있었다. 찾아가 작가키트와 명함을 건네자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일주일에 네 번 모임이 있었다. 누구든 시 다섯 편을 제출한 뒤, 심사위를 통과하면 신작시를 발표하고 선배 시인들의 코멘트를 들을 수 있었다. 회비는 없다고 했다.
시를 낭송하는 일은 그저 평범한 어조로 읽는 것이 아니었다. 페르시아 어로 쓴 시라면 무엇보다 멜로디와 리듬이 살아 있어야만 된다고 했다. 마이크를 잡고 목청을 돋우어가며 낭송하는 모습은 저마다 몹시 절절해 보였다. 모두가 다른 직업을 가진 직장인, 아니면 고교생이나 대학생들이었다. 50대 딸이 80대 어머니와, 부모와 어린 동생 등 온 식구가 함께 온 경우도 있었다.  
학생들은 중고생에서부터 공대생, 약대생, 의대생도 있었다. 어느 공대생에게 물어보았다. 공부하는 시간도 부족할 텐데 왜 시를 쓰느냐, 고. ‘전공은 장차 먹고살기 위한 것이고 시는 하루라도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시인의 사회’가 테헤란에만 100여 곳이 넘었다. 과연 하페즈와 하이얌의 후예들이었다.  
나는 매주 목요일 사이드 바게리 회장이 주재하는 모임에 참석해 하루 한 편의 한국 시를 소개했다. 내가 한국어와 영어로 읽고 나면 번역해준 시인이 페르시아 어로 들려주는 식이었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김춘수의 〈꽃〉, 도종환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천상병의 〈귀천〉 등을 읽어 주었다. 회원들은 아름다운 시라면서 원더풀을 연발했다. 내가 한국어로 읽는 소리를 듣고는 터키어와 비슷하다는 의견들이었다. 역시 시인들의 귀는 밝았다. 우리말이 몽골어, 터키어와 같은 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것을 알아챈 거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회원들 중에는 시만 쓰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동호회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시사 풍자클럽 같은 동호회였다. 나는 어느 대학생 시인에게 물어보았다. 그런 일은 혹시 위험한 일이 아니냐고. 그는 조금도 주저 없이 말했다. ‘시인이라면 당연히 민중을 위해 발언을 해야 할 의무가 있죠.’ 그리고는 의아해하는 내게 담담하게 말했다. ‘그에 따르는 위험도 감수해야 하고요.’
이란에서는 모든 국민이 다 시인이라는 얘기도 들은 바 있어 어느 날 테헤란 대학교 학생들과 점심을 먹고 나서 카페로 자리를 옮긴 다음 나는 기습적으로 말했다. ‘이란 사람들은 모두가 시인이고 모이기만 하면 시를 읊는다던데 한 번 들려줄 수 있겠느냐’고. 학생들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돌아가며 시를 읊기 시작했다. 자신이 외운 시를 번역까지는 아니어도 내용을 충분히 설명해줄 수 있을 정도로 영어 실력도 뛰어났다.
시 낭송은 학생들 사이에서만 생활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어느 대학원 학생가족과 함께 북쪽 카스피 해 쪽으로 여행을 가기로 되어 있어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마침 12시가 넘은 시각이어서 하는 수없이 점심 자리에 끼게 되었다. 내가 페르시아 문학과의 샤피에이 교수를 만나보았다고 했더니 갑자기 학생의 아버지가 숟가락을 든 채로 시를 읊기 시작했다. 샤피에이 시인이 쓴 〈첫사랑〉이라는 시라고 했다.  
교직원들과 식목행사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점심을 먹고 나서 냇가에 둘러앉아 시를 낭송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마도 모이기만 하면 시를 읊는가 보았다. 몇 사람이 나와서 하페즈와 하이얌, 사디의 시를 읊었다. 시냇물 소리가 배경음악이 되어 운율을 맞춰 주었다. 시를 읊은 뒤에는 다 같이 침묵하면서 자연의 소리를 듣는 시간도 가졌다. 한창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냇가에서 조용히 시냇물 소리, 바람 소리,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순한 양떼들로 보였다.      
 
l 대사관에 울려 퍼진 한국 소설

마침내 4월 23일 세종학당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문학 강의를 하게 되었다. ‘작가와 함께 떠나는 한국소설 여행.’ 대사관 로비에 붙은 플래카드 밑으로 세종학당 학생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70여 명이나 되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 반. 나는 영어로 된 PPT를 띄워놓고 되도록 쉬운 우리말로 천천히 강의를 시작했다.    
 “테헤란에 오기 전부터 이곳에서 나를 끌어당기는 강한 자석이 몇 개 있었다. 오마르 하이얌 같은 페르시아의 시인들과 영화감독, 그리고 당신네 나라의 꽃 문화이다."
나는 이란에서 발견한 꽃들을 하나하나 사진으로 보여주었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속 꽃은 그 옛날 다리우스 왕의 꽃으로 연결된다는 내 말에 학생들은 상기된 듯했다. 이제 세계의 리더십은 이 ‘꽃을 든 사람’에게서 나와야 한다고 나는 힘주어 말했다. 이어진 한국문학 강의에서 나는 채만식에서부터 김승옥, 이문열, 박민규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시대에 탄생된 작가와 작품들을 소개했다. 문학의 중요한 역할이 시대의 징후를 잡아내 형상화하는 것이라면 격동기 한국문학은 그 역할에 충실했다고 말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소개할 때는 작가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여주며, ‘꽃보다 남자’의 이민호보다 잘생기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았다. 청중석에서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그들이 내 의도를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학생들의 한글 수준을 생각할 때 한국문학에도 케이팝이나 드라마 못지않은 좋은 작품이 많다는 얘기를 나는 그렇게밖에 에둘러 표현할 길이 없었다.
강의가 끝나고 테헤란 한국대사관에서는 이란 학생들의 한국소설 낭독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남자 : 허위와 속임수와 껍데기뿐인 욕망과, 이 불면의 나이를 벗어버릴 거야.
여자 : 아녜요, 더 거슬러 와야 해요. 원래 당신이 있던 장소까지 와야만 해요.

해설 : 그랬거나 말거나 1982년의 베이스볼
         우리의 슈퍼스타즈는 마치, 지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온, 패배의 화신과도 같았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 오늘도 지고, 내일도 지고, 2연전을 했으니 하루를 푹 쉬고, 그 다음 날도 지는 것이다.

객석은 삶에 대한 성찰이 담긴 서늘한 대목에선 숙연해졌다가 익살스런 대목에선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읽어 내려갈 수밖에 없는 그 서투름 덕분에 단어와 문장은 더욱 깊게 가슴에 새겨졌다.
        
l 테헤란 학생들의 목소리로 듣는 한국의 명시

세종학당에 이어 5월 6일에는 테헤란대학교 외국어대학에서 영어 강의를 했다. 한글을 배우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어 전공자들도 참석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페르시아 문학을 전공한 최인화 교수가 재직 중이어서 제안서를 올리고, 강연 준비를 도와주었다.
이번에는 강연 뒤에 한국어 수강생들의 한국 시 낭송이 있었다. 미리 최 교수에게 원고를 보내 연습을 시켜달라고 부탁했었다. 학생들은 서로 시를 낭송하겠다고 나서서 경쟁이 치열했다고 했다. 시에 걸맞은 배경 음악을 깔고 한국어 시구에 맞추어 페르시아 번역을 자막으로 띄우는 등, 최 교수의 준비는 거의 완벽했다. 더듬거리는 이국 청년들의 어눌하고 낯선 목소리로 듣는 한국 시는 소통이 조금씩 지연됨으로써 문장과 단어가 한 톨 한 톨 알찬 씨앗이 되어 테헤란 하늘 아래 뿌려지고 있는 듯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조그만 꼬까신이 아장아장
       나비를 쫓아가면
       나비는 훠얼 훨
       "요걸 못 잡아?"  

낭송을 했던 학생들과의 뒤풀이에서 어느 학생이 말했다. ‘한국시는 상징과 은유가 풍부해요. 특히 〈국화 옆에서〉는 우리 인생을 말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면서도 벅차오르는 느낌이었어요.’  

l 무덤가에서 하이얌을 목 놓아 부르는 청년들

5월 17일 이른 새벽, 나는 네이샤부르로 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향했다. 18일, 오마르 하이얌의 탄생일에 열리는 기념축제를 보기 위해서였다. 테헤란에서 특급열차로 8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였다. 나는 그곳이 아무리 멀어도 가보리라 결심했었다. 천 년 전 혜초의 족적을 따라가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실크로드 전문가인 정수일 교수에 따르면 네이샤부르는 신라 때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가 다녀온 곳이기도 했다. 돌아올 때는 기차가 한밤중에 어느 역에 섰다. 따라서 내려 보았더니 다들 화장실에서 세수한 다음 기도실에서 짧은 기도를 하고 왔다. 네이샤부르 부근 마샤드에 있는 8대 이맘 레자 모스크에 다녀오는 신자들이었다.
네이샤부르 문화회관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는 스웨덴과 미국 등지에서 온 세계적인 학자들이 하이얌의 시 세계를 다시 조명하고 있었다. 객석에 앉은 내게 잠시 후 기사가 와서 말했다. 방송국에서 나를 인터뷰하고 싶어 한다고. 로비로 나갔더니 앵커가 통역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앵커는 먼저 하이얌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물었다. 나는 평소 생각해 오던 대로 말했다. ‘오마르 하이얌이야말로 이란뿐 아니라 세계적인 지성이다. 그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알려 주었다. 그것은 ‘현재를 잡아라’라는 삶의 지혜이다.’ 앵커는 내게 알고 있는 시 한 편을 외워보라고 했다. 나는 좋아하는 시 한 편을 읊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지혜의 씨를 뿌리고
   내 손의 노동으로 그것을 가꾸었네
   내가 인생에서 수확할 것은 오직 그 뿐
   허나 들으라! 우리는 물처럼 왔다 바람처럼 갈 것인즉

이 구절은 테헤란 대학교 문화센터의 만수리 교수와 영국 시인 에드워드 피츠제럴드의 자유로운 창작번역에 대해 장시간 토론을 한 터여서 자연스럽게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만수리 교수는 하이얌의 시는 이미 12세기에 실존주의 철학을 설파한 것이라고 말했다. 서구는 20세기에 들어서야 그의 철학에 겨우 근접하게 되었다고. 1차 대전 때 전사한 많은 영국 병사들의 주머니에서 총알 박힌 하이얌의 시집이 나올 만큼 그의 시는 당시 청년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는 일화도 얘기해 주었다.  
통역과 함께 점심을 먹고 난 뒤 나는 하이얌의 무덤으로 갔다. 공식 행사 말고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있었다. 시민들이 핑크빛 글라디오라스로 덮인 무덤을 빙 둘러싸고 서 있었다. 한 사람이 하이얌의 시집을 펼치더니 소리 높여 읊기 시작했다. 통역에게 어떤 내용이냐고 물어보았다.   

   세상 속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나
   ‘나’라는 존재에 만족할 수 없네
   평생 세속의 충실한 제자로 살아왔더니
   아직 내 운명의 주인 되지 못했네  
 
청년의 낭송이 끝나자 무덤가에 몰려든 사람들은 차례차례 하이얌의 시를 읊어 나갔다. 목소리마다 어떤 아픔과 애절함이 묻어나는 듯했다. 그들은 900년 전에 살았던 시인을 목청껏 부르고 있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21세기에도 하이얌을 부르도록 만드는 것일까. 네이샤부르에 와서, 아니 이란에 온 뒤로 가장 가슴 찡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