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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사람

현실의 풍경을 그리는 작가 공성훈 인터뷰

안소연 (미술비평가)
  • 공성훈 작가
    공성훈 작가

현실의 풍경을 그리는 작가로 잘 알려진 공성훈(성균관대 예술대학 교수)은 2000년대 이후 줄곧 풍경 회화만을 고수해왔다. 1987년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그는, 당시의 경직된 제도권 미술과 교차하는 젊은 미술가들의 다양한 모색을 경험했다. 당시의 형이상학적 모노크롬 회화에 거리를 두고 공감각적인 키네틱 아트를 시도한 첫 개인전 《블라인드-워크 Blind-Work》(관훈갤러리 1991)를 시작으로, 공성훈은 “예술”을 둘러싼 동시대적 화두에 다가가 지속적인 실험을 펼쳤다. 하나로 고정되는 스타일을 거부하듯 다양한 매체와 형식적 실험을 모색했던 초기 작업을 보면, 그는 예술이란 무엇이며 예술의 가치와 책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되물었다. 때문에 공성훈의 초기 작업은 그가 스스로에게 던진 본유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모색해 나갔던 일련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 무렵, 90년대 한국화단의 실험과 변화의 양상이 탈매체 및 탈장르라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조건들을 충실히 따르고 있을 때, 공성훈은 돌연 “회화”로 복귀해 일상의 사실적 풍경을 캔버스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공성훈 식의 어둡고 우울한 풍경 회화에는 어느새 중견이 된 작가의 현실을 바라보는 농익은 시선이 배어있다. 이에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작가 공성훈을 만나 불안한 현실의 풍경과 마주하고 있는 작가의 속내를 들었다. 인터뷰는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진행된 '하우스토크'와 연계해 진행됐다. 



Q. 오랫동안 회화를 고수해 온 것으로 아는데, 초기 작업에서는 소위 전통적인 회화보다는 다양한 재료와 형식에 대한 실험을 모색했던 것 같습니다. 초기 작업의 실험적 형식과 주제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작업을 20년 이상 해오면서 몇 차례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먼저 대학교 4학년 때의 작업 〈Blind Work〉를 보면, 이 작업을 하려고 창문에 다는 블라인드 커튼을 청계천에 가서 사왔습니다. 블라인드 한쪽에는 은박테이프를 붙이고, 반대쪽에는 형광페인트를 칠해서 모터로 천천히 움직이게 하는 일종의 키네틱 옵티컬 설치미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품이 움직일 때마다 전체적인 파동을 일으키며 시각적인 효과를 일으켰습니다. 80년대 초중반에 대학을 다니면서 시작했던 이 작업은, 기계에 의해 움직이면서 각각의 형태들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보여줬습니다. 당시 제가 미술대학을 다닐 때, 한국 미술계에서는 제 선생님들 세대의 작업, 이른바 한국 모더니즘이라고 하는 모노크롬 회화가 제도권의 대세를 이루던 시절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그 이후에 민중미술이라고 하는 젊은 작가들의 미술 운동도 있었습니다. 작가 지망생이라면 누구나 기존의 작업과는 다른 작업을 하고 싶게 마련인데, 그때 저도 그런 고민을 깊이 하면서 민중미술은 사회과학적 미술인 것 같았고 모노크롬 회화는 인문과학적 미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왜 우리나라에는 자연과학적이거나 공학적인 미술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또 하나는 미술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철저히 시각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화단에는 작품 자체가 보여주는 시각적인 측면보다 작품을 둘러싼 개념적인 언어가 지나치게 많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저는 의도적으로 조금 더 시각적인 측면을 강조하게 됐습니다. 블라인드가 커튼이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로 “맹목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작품 제목을 통해, 보는 것이 전부임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그렇다면 초기 작업은 당시 한국화단에 대한 비판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젊은 작가로서 취했던 당시의 비판적 시각과 작업을 통해 본인이 제기했던 문제의식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나요?

젊었을 때, 욕망은 아주 많은데 그것을 실현시킬 방법은 없고 항상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혀서 화날 때가 많았습니다. 88올림픽 이후 90년대에 이르면서, 누구나 미술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커다란 변화를 체감했습니다. 이때 저는 작가로서 ‘예술이 무엇인가’, ‘내가 예술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했던 작업이 〈예술은 비싸다〉인데, 기둥을 하나 만들어서 미술관 입구에 끼워 넣고 그 앞에 전광판을 설치해서 관객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입장료를 받는 작업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전광판 위의 “지금 보신 것이 과연 예술일까요?”라는 질문을 읽고 관객은 제시된 픽토그램에 따라 답을 하면 됩니다. 만약 그 질문에 관객이 “예”라고 답하면 “그럼 돈을 더 넣으십시오. 왜냐하면 예술은 비싸기 때문입니다”라는 안내를 받게 되고, “아니요”라고 말해도 “돈을 더 넣으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은 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식으로 해서 입장료를 강요받습니다.

Q. 그것은 예술은 무엇인가에 대한 매우 직접적인 문제제기라 할 수 있는데, 1990년대 미술계에서 새로운 실험성을 추구하면서 스스로 모색해갔던 예술적 행위는 과연 어떠한 의미가 있었는지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했던 〈예술작품 자판기〉라는 작업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년에 한 번씩 개최하는 《젊은 모색》展이 젊은 작가들을 위한 유일한 전시였습니다. 저는 그때 제가 임의로 선정한 20명의 작가들에게 담뱃갑 크기의 상자를 나눠주고 이 그림을 1,000원에 팔 테니 담뱃갑에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자판기 하나를 빌려서 그 안에 총 20명의 작가들에게 수거한 작품들을 넣어 전시기간 동안 판매했습니다. 관객들이 와서 보고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자판기에 1,000원을 넣고 버튼을 눌러 사갈 수 있게 했습니다. 자판기라는 것은 생산을 제외한 하나의 유통과정이 기계 한 대에 모두 구현된 시스템입니다. 이를테면 나는 당시 미술계 시스템이라고 하는 것, 매개 기능을 하는 역할을 자판기라는 기계 한 대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사실 그 옆에 커피 자판기와 재떨이도 갖다 놓고 싶었는데 미술관의 반대로 실현하지는 못했습니다. 초반에는 주로 그러한 작업들을 했습니다. 블라인드 작업은 미술을 둘러싼 말들이 너무 많았던 것에 대해 상대적으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때였고, 전광판 작업은 그때 제가 생각하기에 예술 작품이 예술 자체에만 봉사하고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저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예술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시도한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제 행위가 작품으로 할 수 있는 일종의 비평이라 생각했습니다.

Q. 작가 약력을 보면 대학 졸업 후 다른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한 변화의 과정과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나서 서울산업대 전자공학과로 다시 편입을 했습니다. 80년대 당시 미술대학을 다닐 때 학생들이 데모도 많이 했고, 학교 안까지 경찰들이 들어오면서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였습니다. 이런저런 주변 상황 때문에 학교생활을 잘 하지 못했고 더구나 미술이 가진 현실적인 힘에 대해 적잖게 실망을 해서, 졸업을 하고 인천에서 방위근무를 하면서 잠시 영화를 해볼까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미술만이 어떤 물질을 직접 다룰 수 있다는 것에 다시 매력을 느껴서 그것에 조금 더 집중하고 싶기도 했고, 기존의 작업들을 해오면서 기술적 호기심도 있었던 터라, 생각 끝에 다른 방향에서 미술을 접근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공학을 전공했습니다. 일종의 체질개선 같은 것입니다.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다시 미술을 전공했습니다.

Q. 그런데 다양한 매체의 실험과 직접적인 발언을 뒤로 하고, 1990년대 후반부터 돌연 회화에 대한 관심으로 크게 돌아선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

그 무렵 마니프(MANIF)라는 아트페어에 출품 의뢰를 받았습니다. 저는 아트페어라는 미술 시장에서 그야말로 그럴듯해 보이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당시 제가 살던 집 뒷산에 올라가면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풍경을, 청소기에서 뽑아낸 우리 집 먼지로 그려봤습니다. 멀리서 봤을 때는 여느 그림들처럼 보기에 괜찮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먼지, 털, 죽은 벌레 등 더러운 이물질들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나름 제가 깔아둔 복선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래도 사람들이 살까?’ 하루에 인체에서 1g씩의 먼지가 나온다는데, 제 몸에서 나온 먼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편 당시에 미술계 안에서는 “회화의 죽음”에 대한 얘기도 들렸고 해서 당시의 제 관심사를 있는 그대로 반영했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하면서 과거에 미술계를 향했던 문제의식들이 차츰 내부로 향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Q. 문제의식이 내부로 향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현실에 대한 비판적 태도보다는 작가의 실존적 문제에 대한 관심을 말하는지요.

IMF 이후 90년대 후반에 벽제로 이사를 했는데, 평소 주변에서 늘 보던 풍경들이 달라졌고 그러다보니 생각도 많이 달라지고 자연스럽게 작업도 변화를 겪었습니다. 2000년에 처음 회화 작품만으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개 그림”이라고 합니다. 당시 제가 살던 집 마당에서 어떤 아저씨가 키우던 식육용 개, 소위 보신탕용 개가 있었는데 6개월 정도 마당에 묶어서 키운 후에 보신탕집으로 보내곤 했습니다. 그때는 직장이 용인이었는데, 새벽에 출근해서 밤늦게 들어오면 항상 보이는 것이 마당의 외등과 개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밤에 무섭게 빛나는 개의 눈, 개에게 밥 주는 아저씨, 그 공간 속에 있는 흐트러진 내 모습, 삭막해 보이는 마당 등을 그렸습니다. 그러면서 마당에서 더 나가 교외 풍경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도시 근교의 지역은 대개 서울에 기생하고 있지 않나요. 벽제라는 곳은 전통적인 농촌도 아니고 그렇다고 개발된 신도시도 아니고 그 중간에 있는 묘한 정체성을 가진 곳입니다. 화장터도 있고요. 알다시피 교외 풍경이라는 게 가다보면 캄캄한데 갑자기 모텔 간판 하나 나오고, 또 가다가 개고기집 하나 나오고 하는데, 문득 우리사회의 모순 같은 것이 보였습니다. 어떤 문제점들이 중심에서는 항상 봉합이 잘 되는데 주변으로 갈수록 봉합선이 느슨해져 쉽게 벌어집니다. 그렇게 벌어진 봉합들을 제가 늘 보던 현실의 풍경에서 많이 발견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한동안 회화를 안 하다가 다시 시작하기가 두렵긴 했지만, 그런 풍경에 빠져들면서 조금 더 직접적인 매체, 즉 회화로 다뤄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상의 풍경을 그리면서 현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일정한 거리두기, 다시 말해서 지나치게 강하게 주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못 본 척 하지도 않는 어정쩡한 태도를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Q. 앞선 답변과 연결해 볼 때, 초기 작업부터 계속 생각해 왔던 예술 혹은 예술가의 역할과 태도의 문제가 보다 깊이 내면화 되었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오랜 기간 그림을 그리면서 본인 스스로 생각한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저는 바람직한 예술가의 태도는 현실과의 거리두기라 생각합니다. 젊어서 저는 스타일화 혹은 브랜드화 되는, 일종의 작가를 고정시키고 상품화하는 지나친 관행에 대해 반감을 가졌습니다. 그러다보니 늘 의도적으로 다른 매체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나름의 위상적 일관성은 유지했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젊어서는 명사적 사고에 익숙하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서 기억이 흐려지면 뇌에 가장 오래 남는 것이 부사적 표현이라고들 합니다. 제 작업의 변화가 그러한 사고체계를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명사적인 것보다는 부사적인 차원을 드러내 보고 싶은 생각에서 오랜 기간 현실의 풍경을 그려왔습니다. 제 작업이 부사적인 어떤 것을 끌고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한밤중에 마당에 묶여 있는 식육용 개를 그리면서 제 그림에 나타난 현실의 막연한 불안과 징후를 자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교외풍경을 그렸고, 또 일산으로 이사를 가서부터 호수공원 같은 인공적인 풍경에도 주목하게 됐습니다.

작가로서 어려운 점 중 하나가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질문으로 “내가 이 작업을 왜 하는 것인가”,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빠지게 됩니다. 저는 한때 『포럼A』를 통해 여러 가지 시의성 있는 활동들도 해봤는데, 결국 작가는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지금 내가 꼭 해야만 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자주 보여주는 작품 한 점이 있는데, 피카소가 한국전쟁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피카소의 그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입장에서 볼 때 한국 작가가 당시 한국전쟁의 장면을 그리지 않았다는 것(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형적인 한국미술의 한 단면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미술이라는 것이 현실적이어서는 안 됐고, 그래서 늘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고, 현실을 반영하면 뭔가 저속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이러한 사고가 아직도 저 밑에 깔려 있다고 봅니다. 많은 작가들이 현실에 대해 발언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대중이나 관료 쪽에서 보면 아직도 미술은 현실과 별개라는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Q.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2013’에서 보여준 신작에서 볼 때, 작가의 시선이 굉장히 확장되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마당 풍경에서 동네 교외 풍경으로, 나아가 인공 풍경과 광범위한 자연 풍경에 이르는 일련의 변화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벽제의 집 앞마당, 교외 풍경, 인공 풍경을 거쳐, 최근에는 좀 더 커다란 자연의 힘을 통해 우리사회 근저에 깔린 잠재된 불안을 표현해봤습니다. 예를 들어, 제주도의 주상절리 위에서 담배를 피우는 한 남자의 모습처럼 완벽한 통제가 불가능한 광활한 자연 풍경에서 느끼는 인간 본연의 정서적 불안을 깊이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친구가 제 그림에서 지하실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말한 재미있는 기억이 나는데, 아마도 제가 생각하는 풍경은 적어도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살려는 작가로서 나의 의지가 반영된 것일 겁니다. 저는 중학교를 인천에서 다녔는데, 미술부 들어가서 3년 동안 강압적으로 하루에 한 장씩 그림을 그리면서 처음 미술을 배웠습니다. 좋은 기억은 아닌데, 생각해 보면 미술은 어떤 천재적인 재능보다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색채를 찾아가는 과정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좋은 작업을 하려면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함과 철학적 반성이 없다면 그것을 정직한 것이라 말할 수 없지 않을까요. 개인적인 것이지만 스스로에게 투명하고 정직한 작업이 있습니다. “왜”라는 질문에 대한 자기만의 대답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작가로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실감각입니다.

공성훈은 1991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예술에 대한 여러 화두를 던져왔다. 작가는 그것을 일종의 현실감각이라 말하곤 하는데, 이는 현실을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서의 작가가 직면하고 있는 세계와의 일정한 거리두기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소위 80년대 학번이자, 90년대의 역동적인 한국미술을 추동해 나갔던 공성훈의 작업은 지금까지 시대의 화두를 관통하는 작가만의 시각이 선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것은 항상 예술에 대해, 그리고 현실에 대해 작가 스스로 관계 맺는 사유의 흔적을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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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성훈 작가의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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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5.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