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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사람

멋을 부리다,
그래픽 디자이너 안상수 인터뷰

안소연 (미술비평가)
  • 예술가의집에서 진행된 <하우스토크>의 그래픽 디자이너 안상수
    예술가의집에서 진행된 〈하우스토크〉의 그래픽 디자이너 안상수


1990년대 중반, 나는 쥐스킨트(Patrick Suskind)의 소설 『좀머 씨 이야기』에 등장하는 좀머 씨처럼 기다란 외투 차림에 모자를 쓰고 홍익대 캠퍼스를 성큼성큼 걷던 남자를 기억한다.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교수 시절, 그래픽 디자이너 안상수에 대한 인상이다. 지금 그는 늘 작업복 차림의 점프슈트를 입고 다니는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이하 파티, PaTI)” 교장이다. 그의 나이 60세가 된 2012년, 지금으로부터 딱 3년 전에 그는 홍익대 교수직을 그만두고 새로운 학교를 세우는 일에 전념했다. 홍익대학교 응용미술학과를 졸업(1977년)한 그는, 젊은 시절 금성사 디자인실(LG전자 디자인연구소)에 들어가 LG애드의 전신인 희성산업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 후 『마당』이라는 잡지에 아트디렉터로 일했으며, 안그라픽스 스튜디오를 차려 운영하면서 대표적인 안상수체를 비롯하여 이상체, 미르체, 마노체 등 한글 글꼴을 디자인했다. 2007년, 타이포그라피 및 출판인쇄 분야의 최고상으로 불리는 독일의 ‘구텐베르크 상’을 수상했고, 현재 서울디자인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그의 다양한 활동과 경력은 오래전부터 그의 옷차림만큼이나 미술계 안팎의 많은 관심과 주목을 받아왔으며, 최근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 사업’에서 2015년 시각 분야 대상자로 선정되어 그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에 디자이너로서 그가 걷고 있는 남다른 길들을 잠시 엿보면서, 그에게서 그 길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묻고 답했다. 이번 인터뷰는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진행된 〈하우스토크〉와 연계해 진행됐다.

 

Q. 아마도 이 질문은 지난 3년간 안상수 선생님께서 가장 많이 들으셨던 질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1991년부터 2012년까지 약 20년 동안 몸담고 계셨던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교수직을 그만두셨는데, 모교에서의 정년퇴임을 5년 앞둔 상황에서 매우 어려운 결정을 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특별한 이유나 계기가 있었는지요?

 

사실은 조금 더 일찍 그만 두려고 했는데, 솔직히 ‘타고 가는 기차’에서 내리면 후회할 것 같았어요. 그것이 안락한 기차였고 경치도 좋고, 해서 중간에 내리면 저한테 붙어있던 여러 가지 계급장도 다 떨어지는 것이니까 불안하기도 했지요. 종착역까지 안가고 도중에 내려 작은 차로 옮겨 타는 거니까요. 계속 다짐을 했어요. 안 내렸으면 정말 후회했을 것 같아요. 지금은 잘 내렸다고 생각해요. 제가 학교를 하고 싶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매우 오래 됐어요. 계속 마음을 다졌습니다. 그래서 저지른 것이 ‘파티’라는 학교였고, 지금 3년 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학교 만들고 싶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꿈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고요. 사람들의 어떤 희망 같은 것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데 정말 용기가 필요했어요. 어젯밤까지는 ‘하제 학교 가서 그만 둔다고 말해야 되겠다’하다가, 막상 출근하면 또 그 말을 못했습니다. 변덕이 나고 겁도 나고. 그래서 제 방 벽에다 4-5년 동안 이 글을 붙여놨어요. “늦지 않다.” 젊은 나이에 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 예순에 하는 것이라서... 소 잃고 외양간 고쳐도 늦지 않다는 말이겠지요. 제 마음을 담금질 하는데 그만큼의 시간이 걸린 것 같습니다.

 

Q. 파티라는 학교는 어떤 학교인가요?

 

독립 디자인 학교입니다. 타이포그라피란 글자를 멋짓거나 멋지게 부리는 일이거든요. 시각디자인의 가장 핵심입니다. 글자 멋지음이 가장 근본적인 시각 디자인이고, 글자가 제 나라 문화의 가장 밑바탕이잖아요. 그런 뜻에서, 파티는 바로 바탕과 뿌리를 중시하는 디자인학교라는 바램을 담고 있습니다. 파티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작은 학교이고 학위도 없어요. 젊은이들과 뜻을 같이해서 시작했는데, 현재 재학생이 73명입니다. 학부에 해당하는 4년제인 ‘한배곳’, 대학원 과정이라 할 수 있는 2년제 ‘더배곳’이 있어요. 파티(PaTI)는 ‘파주 타이포그라피 인스티튜트(Paju Typography Institute)’의 약자입니다. 파티라는 이름이 즐겁지요? 그래서 그런지 다들 이 이름을 좋아해요.

 

저는 한글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러니 한글 멋지으신 한글 시조 세종임금을 우러를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한글의 중시조가 바로 주시경 선생이라 할 수 있는데, 그분이 조선어강습소를 운영하면서 그 험한 시절에 한글을 가르치셨어요. 독립신문에서 일을 하고, 주말에는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그랬지요. 그런데 그분이 돌아가시던 해에 강습소 이름을 ‘한글배곧’이라고 바꿨어요. 한글배곧. 한글을 배우는 곳이라는 뜻인데, 그때는 디귿 받침을 썼어요. 저는 파티에서 그 말을 되살려 대학을 ‘한배곳’이라 한 겁니다. 그리고 그 위 전문 심화과정을 ‘더배곳’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지금 3년 됐으니까, 한배곳은 현재 3학년이 최고 학년이고, 더배곳은 지난 2월에 네 명의 졸업생이 나왔어요. 저는 파티가 디자인 프로젝트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저는 디자이너로서, 지금 학교를 디자인하고 있는 겁니다. 제 삶을 되돌아보면 크게 두 가지 일을 했습니다. 하나는 디자이너로 일을 했고, 또 하나는 모교에서 20년 이상 전임으로 디자인을 가르치는 일을 했어요. 디자인과 교육이지요. 이 두 가지 일을 합쳐본다면 바로 학교 디자인을 하면 된다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그래서 파티를 시작하게 된 겁니다.

 

Q. 그렇다면 결국 학교를 세우는 일도 디자이너로서의 본업에 충실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일로 전문가로서 수명이 더 늘었다고 생각해요. 파티 때문에 제 수명이 늘어나고 있음을 제 스스로 느껴요. 제 삶의 흔적을 볼 때, 여태까지 해왔던 것보다 다른 무언가가 더 깊게 파이는 느낌이 들어요. 그것을 느낍니다. ‘아, 이것이 본 게임이다’라는. 사실 지금은 완전히 계급장을 떼고 하는 일이거든요. 예전에는 대학 교수라는 계급장의 힘이 강했고, 그 때문에 대우를 받고, 제 능력 이상의 것을 저도 모르게 받고 있다는 느낌이었어요.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빈손인데 실제로 저한테 오는 울림은 훨씬 큰 겁니다. 그냥 저에게 이게 진짜라는 느낌이... 스타를 길러내려고 파티를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칼싸움에 이기는 그런 전설 기사를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삶에 더 밀착된 디자이너를 길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점에서 제가 옳은 결정을 했다는 생각이 점점 더 듭니다.

 

더 근본적으로 얘기해보면 저는 제 삶을 디자인해보고 싶었던 겁니다. 동양에서 60이라는 나이를 보통 한 마디로 보잖아요. 저는 나이 60이 제 삶에서 한 단위가 끝났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 이제 내 삶을 현재 누리는 제도나 사회적 지위로 매듭을 지을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했지요. 사실 65세에 정년퇴임 하면 그때 가서 뭘 더 하겠어요? 그런데 60이라는 매듭은 뭔가 다른 것을 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라 생각을 해서 나름대로 준비를 한 것이지요. 그렇게 하려면 일단 기차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기차는 궤도 위를 달리는 것이니 기차 안에 있으면 그 궤도를 벗어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저는 그 기차 안에서도 특실에 타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정말 겁도 없이 내린 거죠. 빈손으로 뜻 맞는 젊은이들하고 같이 파티를 했어요. 어렵고 짜릿한... 제가 해본 일 중에 가장 어려운 일임을 느껴요. 그런데 어려운 만큼 저한테는 희열을 줍니다. 그렇다면 결국 학교를 세우는 일도 디자이너로서의 본업에 충실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삶에 더 밀착된 디자인이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지금 입고 있으신 점프슈트처럼, 평소에도 늘 같은 차림을 하고 다니시는데 디자이너로서 삶에 대한 어떤 태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인가요?

 

저는 작업복에 대한 어떤 그리움이 있었는데요, 사실은 대학에 있었을 때도 이렇게 하고 다니고 싶었어요. 어느 정도 자유롭게 옷을 입고 다니기는 했는데 이렇게까지는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파티를 시작하자마자 이 옷을 입었어요. 파티에 입학하면 학생들에게 이 옷을 줍니다. 작업할 때 입으라고 주는 겁니다. 오래전 일본 무사시노 미술대학 구내 화방에 갔더니 여러 가지 색깔 작업복이 걸려있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아 저게 맞다.’ 미술학교의 구내 화방에는 미술 재료들이 있어야겠지만, 그래도 작업복이 꼭 있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화방에는 작업복을 팔지 않아요. 앞치마는 팔지만... 사실 옷이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주잖아요. 평소에도 이 작업복을 입고 다닙니다.

 

Q. 삶에 밀착된 디자이너로 가르치기 위해 파티가 중점적으로 하고 있는 일이나 교육방식이 따로 있는지요? 아무래도 국내에서 가장 큰 미술대학 시스템에 오래 몸담고 계셨다가 지금은 가장 작은 규모의 독립 디자인대학을 운영하시는데 있어서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느끼시는 바가 클 것 같습니다.

 

지금 미술대학은 거의 모두 종합대학 속에 속해 있습니다. 적어도 미술학교는 멋스러움, 곧 예술적인 감성을 시각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미술학교 시스템 자체가 달라야 한다고 봅니다. 고착된 대학 시스템을 바꿀 수 있을까? 사실 벽돌 하나를 못 빼요. 왜냐하면 벽돌 하나를 빼면 전체에 영향을 주는 겁니다. 부분이 전체에 다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대학 운영 시스템은 점차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나날이 진화되어서 더욱 정교해지고 있습니다. 컴퓨터 조건에서 조금도 예외가 허용되지 않지요. 저는 제가 하는 것이 옳다 그르다는 게 아니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어떤 것이 좋은가를 계속 의심하면서 여러 대안을 찾아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한 가지 시스템만 존재하면 그것은 건전한 게 아니에요. 사실 건전한 건 들판의 들꽃처럼 다양하게 크는 것입니다. 그게 정상이에요. 단일화 또는 표준화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더욱이 예술교육이 표준화된다는 것은 어떤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파티에서는 커리큘럼을 학생들하고 같이 짜요. 스승들이 먼저 계획을 세우는데 아주 오랫동안 회의를 합니다. 오늘 낮에도 커리큘럼 회의를 하다 왔어요. 이번 3학년에 “집단 지도” 과목을 만들기로 했는데, 어떤 회사의 디자인팀 10명이 집단으로 파티 배우미들을 가르치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배우미들은 디자이너로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현실 속에서 찾아 나가게 되지요. 그 결과물이 화려하지 않더라도 자기가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아 나가는 것이고 그 모든 과정을 배우미들과 스승들이 같이해나간다는 것입니다.

 

Q. 가르치는 일 외에 지금까지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주로 어떤 활동을 해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서 한 5년 일했습니다. 제 첫 직장이 금성사(현 LG전자) 디자인연구실을 거쳐 LG그룹 광고대행사였던 희성산업에서 디자이너로 일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월간 마당에서 일했고, 이후 안그라픽스라는 스튜디오를 6년 동안 하면서 주로 편집디자인을 하며 책도 만들고, 로고타입이나 여러 디자인 일을 하고 그랬어요. 지금도 디자인 일을 하고 있어요. 요즈음 팝업북을 만들고 있어요. 힘이 닿는 한 꾸준히 하고 싶습니다.

 

Q. 그래픽 디자이너 안상수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안상수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상체’도 있었고요. 2007년 독일에서 ‘구텐베르크 상’을 수상하시기까지 한국 타이포그라피에 있어서 선생님의 여러 시도들이 있었을 텐데요, 그 가운데 몇 가지 작업들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안상수체(안체)’는 1985년에 처음 나왔어요. 일반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컴퓨터 프로그램 ‘아래아한글’에 탑재되면서부터고, 한때 문화체육관공부에서 공식글꼴로 지정되면서 크게 알려졌어요. 또 처음 『과학동아』 잡지 제호로 쓰였고 지금도 쓰고 있고 있어요. 그리고 안체를 풀어쓴 것이 ‘이상체’입니다, 시인 이상은 많은 창작자들의 관심 대상이지요. 특히 이상은 시인임에도 우리나라 현대 타이포그라피의 개척자 역할을 했어요. 제가 이상 연구를 하면서 그에게 더욱 빠졌고, 그래서 글꼴 이름을 그의 이름으로 붙였지요. 처음 안체나 이상체를 사람들한테 보여줬더니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반응이 시큰둥하고 그랬지요. 심지어 “이것도 글자냐?”라는 소리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는 ‘좋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런 예감을 느낄 때 기분이 좋습니다. 『마당』 잡지에서 일할 때 매번 기사 제목 글자들을 눈에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새로 써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야겠다는 굳은 의지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발표는 안했지만 그때 만들었던 ‘마당체’라는 글꼴이 있었어요. 그때 역시 기분 좋은 예감을 느꼈어요. 제 디자이너 삶에서 가장 큰 분기점은 바로 ‘안체’였어요. 그 이전과 이후가 분명히 달랐어요.

 

Q. 한쪽 눈을 가리고 서 있는 인물사진 〈원 아이 프로젝트(One Eye Project)〉도 안상수체 못지않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나요? 꽤 오랜 기간 ‘원 아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인물 사진을 찍고 다니시는 이유도 궁금합니다. 그러한 작업은 보통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하는 일들과 약간 다른 활동으로 보입니다.

 

『보고서/보고서』 창간호 표지에 한쪽 눈을 가리고 찍은 제 사진을 넣었어요. 그때가 1988년도인데, 그러고 나서 한참 잊고 있다가 어느 날 그게 괜히 해보고 싶어서 다른 사람들을 찍었어요. 처음부터 특별한 뜻은 없었지요.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재미있어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마치 일기처럼 만난 사람들을 그렇게 찍어 올린 겁니다. 어느 날 중국에서 전시 제안 연락이 왔어요. 디자인 전시인 줄 알았는데 ‘원 아이 프로젝트’ 전시를 하자는 거였어요. 당시 대충 헤아려보니 3만 장 정도 사진을 찍었더군요. 전시 제목은 ‘일목요연’이었습니다. 그러고도 ‘원 아이’ 전시를 몇 번 더 했어요.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한 눈 빛박이’를 하는 뜻이 뭐냐고 자꾸 물어봅니다. 그냥 만나는 사람들을 찍는 것 말고 특별한 뜻은 없어요.

 

아르코 예술자료원에서 구술채록 사업에 제가 그 대상자가 되어 준비하느라 옛날 자료들을 이것저것 정리하고 있는데, 저는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더라고요. 제 스스로 느끼는 것은 제가 늘 지금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스스로를 존중하고 있습니다. 의식적으로 저를 북돋워 주는 거지요. 부족한 나를 어루만지고 칭찬하는 겁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뭐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어요. 제가 교육이나 디자인에 대한 어떤 뜻이 있다면, 제가 시스템을 통째로 바꿀 수 있겠어요? 더구나 글로벌한 시스템인데. 그냥 제가 하는 만큼 혼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저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이 새로운 시도에 목말라 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저는 무언가 뜻있는 일을 하고 떠나고 싶어요.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들이 그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픽 디자이너 안상수와의 대화가 끝났다. 평소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삶에 대한 ‘멋짓’은 디자이너로서 그가 가진 태도를 단번에 말해준다. 그는 자신의 삶을 디자인하며, 그것에 참 멋을 부릴 줄 아는 디자이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삶에 더욱 밀착하기 위해, 예술마저 치열한 경쟁으로 내몰린 지금 뜻밖에도 경쟁 없는 학교를 세웠다. 최고의 디자이너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그가 거짓 없이 현실에 다가가는 방법은, 그의 말마따나 눈높이를 낮춰서 변화할 세상을 기다리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함께 한 파티의 길동무들과 다소 우회하는 먼 길을 기꺼이 걷고 있다. 그는 옳았다. 디자이너이자, 교육자로서 그는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울려 멋짓을 하는 일의 소중한 가치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그들은 그것을 날마다 실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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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5.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