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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돼지의 눈, 인간의 눈

김정수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또한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인간의 본질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이라는 점에서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오래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철학자, 사상가, 종교인들이 이 문제를 두고 고민해오면서 나름 현명한 명언들을 남기기도 하였다. 대중들 사이에 구전되어 내려오는 속담들 중에도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지혜가 담겨있기도 하다.
우리 옛 속담에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춥고 배고프면 다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을 좀 더 고상하게 표현한 대표적인 예가 아브라함 마슬로우라는 학자가 주장했던 욕구단계론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는 먹고 자고 입는 것과 같은 동물적인 하위욕구가 있고, 그 위에 사랑과 존경을 받고자 하는 욕구, 나아가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 및 자아실현 등과 같은 상위욕구들이 계층제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얼핏 들으면 과히 틀린 것 같지는 않은, 그래서 많은 경우 당연한 상식으로 통용되는 사회적 통념이기도 하다.
이렇게 ‘배고픈 소크라테스 보다 배부른 돼지가 낫다’는 식의 인간관을 가지고 바라보면 문화와 예술은 문자 그대로 ‘사치재’일 수밖에 없다. 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해서 꼭 큰일 날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경제학에서는 보통 쌀이나 옷은 ‘필수품’이라 하는 반면 문화·예술은 ‘사치재’라고 부른다. 소득이 감소한다고 해도 의식주를 위한 지출은 큰 변화가 없지만 문화·예술 소비를 위한 지출은 큰 폭으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식주는 인간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지만 문화·예술을 누리지 못한다고 해서 사람이 곧 죽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춥고 배고픈 사람에게 문화와 예술은 한낱 불필요한 사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할까? 문화와 예술은 ‘사치재’라는 일반적 인식이 과연 틀림없는 것일까? 다음의 사진을 한번 보자.


  • 돼지의 눈, 인간의 눈

이 사진은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했던 탈레반 정권이 2001년 축출된 직후에 수도 카불에서 있었던 소동을 찍은 것이다. 이 장면은 과연 어떤 상황이었을까? 아마도 굶주린 주민들이 식량배급을 서로 먼저 받기 위해 창고에 한꺼번에 몰려들어 아우성치는 모습이 아닐까 짐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진 속의 사람들은 식량이나 생필품을 배급받기 위해 몰려드는 난민들이 아니다. 실은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탈레반 집권 기간 내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일체의 오락이 금지되었었다. 그런데 5년 만에 영화관이 다시 문을 열자 그동안 문화생활에 굶주렸던 수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기 위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던 것이다. 경찰이 과도하게 흥분한 관중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2명이 체포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 사진은 사실 ‘문화적 굶주림’이 얼마나 참기 어려운 고통인가를 그 어떤 학문적 이론들보다 더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먹을 것을 먹지 못한 배고픔이나 마실 것을 마시지 못한 목마름 못지않게 문화적인 허기짐과 갈증 또한 인간의 근원적 욕망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문화·예술에 대한 욕구는 ‘배부르고 등 따뜻한’ 한량들이나 즐기는 사치라는 생각은 잘못된 착각이다.


아프가니스탄의 경제수준은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열악하다. 만약 문화·예술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참이라면 그토록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주민들이 식량도 아니고 한낱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아귀다툼하듯 소동을 벌이는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경제발전이나 의식주 수준이 낮으면 문화생활에 대한 갈망도 약하리라는 생각은 실상 잘못된 착각이라고 할 수 있다. 신체적 만족을 주는 의식주와 정신적 만족을 주는 문화·예술은 인간에게 똑같이 중요하고 근본적인 욕망인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와 예술이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사치재’라는 잘못된 인식은 왜 그렇게 널리 퍼져있는 것일까? 우선 사람들의 소비지출 패턴에 대한 통계자료를 보면 사실 욕구단계론적 시각이 맞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IMF 사태 직후인 1998년의 통계에 의하면 평균 소득이 전년도 대비 6.7% 감소되었을 때, 주거비는 8%, 주식비는 8.8% 줄어든 반면 교양·오락비는 약 세 배 가까운 22.6%나 줄어들었다. 이 자료를 근거로 문화생활에 대한 지출은 소득탄력성이 매우 큰, 전형적인 ‘사치재’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소비지출이라는 외부로 드러나는 행태로부터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생각을 유추하는 데 있어 심각한 왜곡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문화·예술에 대한 소비지출이 줄었다고 해서 반드시 문화·예술에 대한 개개인의 관심이 줄었다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문화소비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문화에 대한 갈급함은 더욱 심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개인적으로 비용을 지불하지 않더라도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널려있다. 따라서 소비지출에 대한 통계자료에 근거해서 문화·예술을 사치재라고 단정하는 것은 정확한 해석이 아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현실은 A이다’라는 실재론적 명제로부터 ‘그러므로 현실은 A이어야 한다’라는 당위론적 명제를 도출하려는 시도이다. 백번 양보해서 문화·예술이 사치재적 특성을 지닌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라고 하자. 그러나 현실이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문화·예술을 사치재로 (특히 정책적 차원에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심각한 비약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식의 주장은, 비유컨대, 마치 사람들이 종종 거짓말을 하는 것이 현실이니까 거짓말을 계속하도록 장려해야 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물론 이와 같은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넌센스이다. 현실의 실재로부터 그대로 당위가 도출될 수는 없으며 도출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이를 위해 필요한 행동방침을 모색함에 있어서는 현실을 참고하되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근간이 되어야 한다.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말이 있다. 세상이 지금 이 모양인 것은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또한 어떤 존재이어야 하느냐에 대해서도 어떤 필연적인 정답이 있을 수 없다. 현실은 우리의 생각에 의해 빚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눈으로 인간을, 세상을 볼 것인지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모습이 되느냐는 결국 우리가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느냐에 의해 좌우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돼지’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돼지가 되는 것이고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인간이 되는 것이다. ‘돼지’의 눈으로 보면 그저 배부른 것이 최고이다. 그리고 밥 많이 먹여주지 않는 문화와 예술은 문자 그대로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처럼 그저 있으나 마나한 ‘사치재’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간’의 눈으로 보면, 밥을 먹지 못하고 물을 마시지 못한 육체적 굶주림과 갈증 못지않게 문화적 굶주림과 갈증 역시 똑같은 고통이다. 진주 목걸이는 배부른 사람에게나 배고픈 사람에게나 다 똑같이 예쁘고 귀하게 보인다.

인간에게는 의식주에 대한 욕구만큼이나 문화·예술에 대한 욕구 역시 똑같이 소중한 욕망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돼지우리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들 것인가는 결국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리고 필자가 보기에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지는 너무나 자명해 보인다.


김정수
김정수

고려대 법과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Yale University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고려대 공공행정학부에 재직하였으며 현재는 한양대 정책과학대학 행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문화정책학회 창립이사, 한국정책학회 편집위원장, 문화체육관광부 자체평가위원, 공공기관 경영평가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주요 관심분야는 문화정책과 정책이론이다. 주요 저서로는 〈문화행정론:이론적 기반과 정책적 과제〉(학술원 우수도서 선정), 〈스크린쿼터의 추억:한국영화 의무상영제도 변천사〉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스크린쿼터와 딴따라:대중문화에 대한 정부개입과 문화산업경쟁력에 관한 시론’, ‘미녀와 야수:문화행정의 새로운 패러다임 모색’, ‘불확실성, 결정오차, 그리고 제비뽑기의 역설:문예진흥기금 지원심의방식에 대한 역발상’, ‘문화생산의 글로벌화에 따른 새로운 문화정책 패러다임의 모색:우리나라 영화산업의 사례를 중심으로’, ‘(신)한류에서 배우는 문화정책의 교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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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5.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