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제로 움직이는 유럽의 공연계는 한 시즌이 끝나는 여름이 오면 수려한 풍광이나 역사에 기대 도처에서 열리는 페스티벌로 시선을 돌린다. 세찬 여름 태양에 한껏 달아올랐던 고대 로마 원형경기장의 돌바닥이 기분 좋은 따뜻함으로 느껴지는 밤이 찾아오면, 이탈리아의 베로나에는 15,000명의 관객들이 하나 둘 손에 쥐고 있던 양초에 불을 붙인다. 쉬는 시간이면 목에 가판대를 두른 이들이 소리 높여 맥주며 아이스크림 따위를 팔고, 관객들은 야구 경기를 보듯, 맥주를 마시고 아이스크림을 빨며 느긋하게 한 편의 오페라로 저녁을 보내는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10년을 기다려 거머쥔 티켓을 부여잡고, 40도에 육박하는 공연장― 전통을 중시하는 페스티벌 측은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는다. ― , 팔걸이도 없는 근 40년 된 딱딱한 나무 의자 ― 페스티벌 측은 나무 의자에 쿠션을 덧대지 않는다. 홀 음향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5유로를 내면 보통 방석을, 7유로를 내면 두툼한 방석을 대여해 준다. ― 에 앉아 네다섯 시간을 버티노라면, 매 공연마다 적어도 한 명의 관객은 앰뷸런스에 실려 나가는 축제도 있다. 축제보다는 ‘순례'에 비유되는 심각하고 진지한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 두 페스티벌의 사이 어디쯤에 영국의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이 있다. 런던에서 한 시간 기차를 타고, 다시 페스티벌 측이 준비한 셔틀버스로 15분간 외진 시골길을 달리면 이내 사랑스러운 정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오페라 극장 옆 영국식 정원에는 정성껏 가꾸어진 온갖 기화요초들이 그윽한 향내를 품어내고, 저편 둔덕에는 양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연꽃으로 그득한 호수 옆에는 턱시도며 드레스로 꽃들만큼이나 치장한 관객들이 도처에 앉아 샴페인을 마시며 피크닉을 즐긴다. ‘내 그대를 한 여름날에 비할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가 이야기하던, ‘그대’에는 못 미쳐도 비교의 기준이 되어주던 한 여름날의 아름다움을 마주하는 듯하다. 이곳에서는 바이로이트와 같이 엄격한 방식으로 속세로부터 단절을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이 단아하고 목가적인 전원을 빌어 세상을 잠시 잊게 되는 것이다.
l 한 발짝 앞서, 그러나 함께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은 클래식 음악, 특히 오페라를 사랑한 영국의 귀족 존 크리스티와 전문 성악가였던 그의 아내 오드리 밀드메이가 이루어낸 업적으로, 오페라 중심의 페스티벌이다. 자신들의 영지 글라인드본에 오르간이 있는 공간을 만들어 가족과 친구들을 위한 음악회를 개최하고 직접 출연할 정도로 음악을 즐기던 이 부부는 1934년, 저택 한 편에 300석짜리 오페라 하우스를 짓기에 이른다. 당시 득세하던 나치 정권을 피해 영국에 와 있던 지휘자 프리츠 부슈를 음악감독으로 삼아 2주에 걸쳐 두 편의 모차르트 오페라를 올린 것이 이 페스티벌의 작은 시작이었다. 이후 이 페스티벌은 크리스티 가족의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예술관과 명민한 사업적 판단으로 영국 클래식 음악계의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초기 크리스티 부부와 함께 페스티벌을 운영한 공연기획가 루돌프 빙은 이후 에든버러 페스티벌을 설립하고,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은 첫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자신들의 프로덕션을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1955년까지 가까운 관계를 지속한다. 또한 글라인드본 페스티벌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던 벤저민 브리튼의 오페라 두 편(루크레티아의 능욕, 알버트 헤링)이 이곳에서 세계 초연된다. 뿐만 아니라 몬테베르디부터 스트라빈스키, 부조니, 뿔랑, 헨체 등 고전과 현대를 넘나드는 수많은 작곡가들의 작품을 영국 초연했을 뿐 아니라, 1644년 이후 공연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17세기 이탈리아 작곡가 카발리의 오르민도를 발굴하고, 새 오페라를 지속적으로 위촉하는 등 적극적으로 영국 오페라계의 레퍼토리를 넓혔다.
페스티벌과 같은 해에 태어난 아들 조지 크리스티는 실로 선구자적인 인물로, 단단한 대지에 발을 딛고 서서 구름 위를 보고자 했던 인물이다. 그는 41년간 페스티벌을 운영하며, 지인들 사이에 알음알음 즐기던 시골 마을의 작은 축제를 영국을 넘어선 전 세계의 축제로 탈바꿈시킨다. 이제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은 여름 페스티벌 기간인 4개월 동안 6편의 오페라를 선보이고, 이후 영국 전역을 투어하며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오페라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크리스티는 세계적인 동시에 지역 커뮤니티와 공존하는 페스티벌을 만들려 했으며, 무엇보다도 이러한 비전이 지속 가능하기를 원했다. 그는 예술적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경제적 자립이 우선한다는 신념으로 일체의 공적자금 지원 없이 페스티벌을 운영했으며, 이 같은 자립에 필수적이던 1,200석 규모의 새 오페라 극장 역시 펀드레이징만으로 건립해 낸다. 현재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은 수입의 65%를 티켓 판매로 충당하며, 그 나머지를 기부와 후원 등을 통해 채우고 있다. 이는 작년 기준 수입의 25%를 티켓 판매로 이룬 영국 국립 오페라단(ENO)이나 33%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 비교할 때 더욱 인상적인 숫자로 다가온다. 더군다나 최근 향후 3년간의 정부 보조금이 약 30% 삭감된 영국 국립오페라단의 미래를 걱정하는 수군거림을 들으면, 경제적 자립에 대한 고집에 가까운 자부심의 진가를 절감하게 된다.
또한 지속 가능한 오페라 페스티벌을 위해서는 교육을 통한 새로운 관객의 창출이 필수적으로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는 통찰 아래 젊은 관객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고 있다. 관객 개발이라는 개념이 생소하던 1979년 이미 학생을 위한 공연을 시작한 이래, 현재 30세 이하의 젊은 관객에게는 일반 관객보다 먼저 예매할 수 있는 기간을 부여한다거나, 한 회 공연의 모든 좌석을 그들에게 30파운드에 파는 등, 티켓의 2/3 이상이 100파운드(약 17만 원)를 넘는 다소 비싼 글라인드본의 오페라를 경제적 여유가 없는 젊은이들도 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작년에는 1990년부터 운영한 커뮤니티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90명 전원이 마을 주민으로 이루어진 합창단과, 아마추어와 전문 연주자가 함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그리고 전문 성악가들이 글라인드본의 연출과 무대의 힘을 빌어 새 창작 오페라 〈이마고〉를 무대에 올려내며 로열 필하모닉 소사이어티로부터 ‘배움과 참여’ 부분 상을 받아낸다.
관객과의 소통 방식에서도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다. 이미 일반화된 오페라의 라이브 극장 상연은 물론이거니와, 올해부터 텔레그래프지와의 협약을 통해 해당 웹사이트에서 올해 프로덕션 중 세 편의 작품을 라이브 스트리밍을 통해 무료로 제공한다. 또한, 현재 페스티벌을 책임지고 있는 조지 크리스티의 아들 거스 크리스티는, 150만 파운드(약 26억 원)의 금액을 들여 풍력발전기를 극장 근처 언덕에 설치, 이를 통해 글라인드본 페스티벌 전기의 95% 이상을 공급받는 동시에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최소화하는 등 경제적인 동시에 친환경적인 페스티벌로 만들고자 노력한다.
l 시대와 시류 사이
이렇듯 시대를 앞서가는 이곳에서 올해는 달갑지 않은 논쟁이 페스티벌 초기를 달궜다. 2014 페스티벌의 문을 여는 슈트라우스 〈장미의 기사〉에서 옥타비안 역을 맡은 젊은 메조소프라노 타라 에럿에게 타임스, 가디언, 텔레그래프, 파이낸셜 타임스, 인디펜던트 등 영국 주요 신문사의 (남성)문화비평가들이 입을 모아 독설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논란의 중심이 된 타라 에럿은 20대 후반의 성악가로, 현재 독일 바이에른 국립극장을 기반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이번 페스티벌을 통해 영국에 데뷔한 전도유망한 신예이다. 그녀의 공연에 대한 평에는 ‘짜리 몽땅한’, ‘보기 흉한' 등 다양한 수사가 동원되었는데, 요점인즉슨 이 가수가 삼각관계의 중심에 서는 젊은 남성역을 맡아 관객을 몰입시키기에는 너무 짧고 뚱뚱하다는 것이다. 이에 격분한 동료 가수가 가디언에 ‘오페라 가수의 제일 중요한 자질은 목소리이지 외모가 아니며, 커리어를 펼치려는 젊은 여성 성악가에게 인신공격에 가까운 외모 평가는 삼가달라'는 골자의 반박문을 보내고, 독자들 역시 거세게 반박하며 급기야는 페스티벌 측이 홈페이지에 에럿을 옹호하는 성명서를 내기에 이른다.
이번 논쟁을 만들어낸 문화예술 담당 기자들은 오페라의 본질을 이루는 가수의 음악이나 연기, 작품 해석 등에 대한 평가는 등한시한 채, 눈앞에 보이는 외모만을 자신들의 잣대로 가늠하고,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토해내며 배역의 적절함을 논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디지털 혁명으로 인해 눈에 보이는 것이 그 어느 시대보다 더 중요해지고 가까워진 지금, 외모지상주의는 일상에 편재하고, 전통을 중시하는 오페라계에 뒤늦게 이런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리라.
80년간 시대를 이끌어 간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이 이런 반갑지 않은 시류에 휩쓸리지 않으리라 믿으며, ‘타라 에럿(Tara Erraught)’. 유튜브에서 그녀를 검색해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며 독자 여러분도 함께 심사숙고해주길 바란다.
(사진: Glyndebourne Festival, 참고 http://glyndebourne.com/terms-conditions-0)
[기사입력 : 2014.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