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호보기
  • 구독신청
  • 구독자의견
  • 아르코발간자료
  • 인쇄
  • 맨위로 이동

문화정책 이슈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인문정신문화정책과 예술

홍기원 (숙명여대 정책·산업대학원 교수)
  •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인문정신문화정책과 예술


l 한국문화정책에 반영된 인문정신의 역사

문화정책의 비교 연구를 하다 보면 한국문화정책의 특징이 정책영역의 설정과 문화의 정의가 갖는 포괄성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서구, 특히 영미권 국가들은 예술정책과 문화정책을 구분해서 사용하는데 예술정책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한다. 이에 비하여 역사적으로 민족국가 패러다임이 지배적이었던 국가들은 문화정책이라는 용어에 익숙하다. 한국의 경우에는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이러한 특징이 극대화된 경우에 해당한다. 근대적 의미의 문화정책이 해방 이후에 수립되었다고 가정할 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억압되었던 민족정신을 회복하고 단절된 문화적 유산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소명이 문화정책의 중요한 지향점이 된 것은 자연스러울 수 있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조선시대부터 이미 국가운영의 목표이자 도구로써 문화를 중시하였음을 발견할 수 있다. 성리학적 국가 이상의 실현을 위해서 예악은 필수적인 덕목이었으며 이를 위하여 문학, 음악, 춤, 미술 등 현대 문화정책에서 다루는 모든 장르가 동원되었다. 특별히 음악의 경우는 의례나 윤리와 관련된 중요한 덕목이었다. 「예기(禮記)」의 〈악기(樂記)〉 편에는 “... 군자는 음악(樂)을 통해 도덕적 수양을 제고하기를 즐거워하고... 군자는... 음악(樂)을 널리 보급하여 백성들을 교화한다.”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군주가 음악을 잘 앎으로써 이상적인 통치자의 상에 다다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여러 군주들 중에서도 유독 세종이나 정조가 음악과 얽힌 일화가 많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문화적 업적에 대한 평가가 높은 세종, 성종, 정조와 같은 군주의 경우 어느 한 분야의 문화만 활발히 한 것이 아니라 문화의 전반적인 발전이 있었다는 점은 특이할 만하다. 즉, 소위 인문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다양한 인문사상의 연구와 저술, 활발한 문화예술 활동, 더 나아가서는 기술발전에 이르기까지 문화와 문명의 총체적인 도약이 있는 시기였다. 그러므로 문화의 개념을 광의로 정의하고 그 정책범주를 포괄적으로 운용하는 전통은 특정 정부의 경향성이라기보다는 역사적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l 새로운 문화정책에 대한 집착의 오류

새 정부 초기에 문화융성이 주요 국정과제의 하나로 채택되면서 문화예술계는 여러 기대와 희망을 표출하였다. 과거에 필자가 정책연구를 업으로 삼던 시절에, 정권교체기 정부정책의 기조와 세부과제에 대한 작업을 했던 입장에서 현 정부의 추상적인 정책비전이 어떤 구체적인 정책목표와 전략으로 기술될 것인지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어느 정부든 과거 정부와 차별성을 가지려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그 포장이 바뀌든 실질적 내용이 새롭게 구성되든, 무엇인가 그럴듯한 정책 어젠더의 필요성은 늘 절박하다. 그 결과 현 정부의 가장 차별화된 정책으로 제시된 것이 인문정신문화 진흥이라는 영역이다. 이에 따라 중앙부처에 독립된 과가 동일한 명칭으로 신설되었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의 사상 검열이나 특정 사상에 대한 권위적인 가치 부여와 같은 부정적 경험 때문에, 이렇게 포괄적인 정책영역의 문제를 정부개입을 통하여 해결하는 방식을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다. 독일정부가 2차대전 이후 문화정책을 생활문화와 예술로 한정하고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정부의 차원에서 다루도록 제도화시킨 이유도 이러한 우려에 더해졌던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인문학, 정신문화, 문화전통 등 문화예술의 서비스 전달체계보다는 교육시스템을 통해 제공되던 영역에 대한 관할의 문제가 더 큰 골칫거리였고 문화예술과 관련하여 어떤 구체적인 정책목표와 성과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가가 현실적인 어려움이었을 것이다. 실제도 직제상의 업무를 보면 민족문화진흥업무, 문화예술 인프라를 통한 인문정신문화의 진흥, 정신문화 관련 연구와 보급, 독서문화진흥 등 기존의 업무단위들이 수행하던 내용에서 크게 변화된 것이 없다. 그렇기에 결국은 정책의 내용을 무엇으로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가 해당 정책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관건이 된다. 정책실무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어떻게 하면 새로워 보이는 정책사업을 개발해서 집행할 것인가에 고민이 깊었을 만하다.
무엇인가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강박과 차별화된 정책 업적을 남기고 싶은 권력자는 본질적으로 중요시되어야 하는 정책내용을 간과하고 새로운 것을 쫓아 수사적인 차원의 정책을 수립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게다가 문화정책은 우물을 파듯이 계속 파내면 무엇인가 새로운 영역과 내용이 샘솟을지도 모른다는 ‘마르지 않는 문화의 샘물’이라는 착각에서 이런 함정에 취약하다. 예를 들어 정부가 바뀐다고 해도 국민건강을 보장하기 위한 의료보험제도의 근간이 상실될 리가 없으며 의무교육을 통해 국민 개개인의 지적‧인간적 삶을 보장한다는 원칙에 변화가 생길 수가 없다. 오히려 본질적 정책사업을 수행하는 방법론과 정책의 성과목표에 대한 설정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문제가 중요하게 논의된다. 그러나 여러 정부를 거치면서 문화정책이 보여준 모습은 문화정책의 핵심 영역을 어떻게 설정할지에 대한 기준설정도 변화무쌍하였으며 지속성을 가지고 추진해야 하는 정책사업에 대해서조차 그 기반을 흔드는 경우도 있었다. 가장 두드러진 사례가 기초예술 혹은 순수예술에 대한 지원정책이다. 기초예술에 대한 정책은 기초 예술 그 자체에 대한 지원과 함께 그것이 생명력을 얻어 지속적으로 삶에 뿌리내릴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문화정책의 핵심 분야인 것이다.
 
l 인문정신문화 진흥은 결국 문화예술진흥정책

새롭게 등장한 인문정신문화의 진흥정책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각종 문화예술분야가 내재적으로 공유하는 가치라는 점에서 이를 따로 분리해서 진흥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든다. 문화정책을 통해 지원하는 어느 분야도 인문정신을 표방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연극이나 뮤지컬로 공연되는 문학작품, 노래로 만들어지는 시, 춤으로 만들어지는 전통이야기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며 예술가들이 이러한 활동을 문화시설 밖으로 가지고 나가 학교에서, 병원에서, 기업체에서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면 예술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또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국 인문정신문화의 진흥은 독서를 열심히 하도록 북콘서트를 하는 것을 넘어, 이미 제도권과 사회교육을 통하여 다양한 경로로 제공되던 인문학강좌를 넘어, 문화정책의 핵심 영역으로 다루어지는 정책과의 연계성 속에서 그 활로를 찾지 않으면 문화정책으로서의 성과를 담보하기 어려울 수 있다. 미국의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인문교육을 강조하는 저서에서 인문교육만이 삶이 전인적일 수 있도록 하는 기초를 제공하며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인간다움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하였다. 문화정책은 문화와 예술의 진흥을 통해 사람들이 인간적이고 정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그 목표를 삼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인문정신이 스며들어 있는 다양한 문화적 자산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창의적으로 결합하여 더 많은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 예술가로 하여금 이 시대의 인문정신이 깃든 창작을 통하여 미래의 문화적 지층을 단단하게 쌓아 나가도록 하는 것, 이러한 것이 문화정책에서 해야 하는 인문정신문화의 진흥이 아닐까 생각한다. 과도하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이미 하고 있던 것을 잘 하는 것, 더욱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협력하는 것, 흩어져 있는 노력을 효과적으로 연결하는 것, 이러한 것이 새로워 보이지만 계속 해오던 행위에 명분과 정당성을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홍기원
홍기원

서울대 미학과와 뉴욕대 행정대학원 및 연세대 행정학과에서 수학하였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서 문화정책을 연구하였으며 현재 숙명여대 정책‧산업대학원에서 문화예술행정 주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연구의 관심사는 문화정책, 예술교육, 국제문화교류, 문화다양성이다. 「Cultural Policies in East Asia(L. Lim & HK Lee eds., Palgrave McMillan, 2014)」 에 Nation Branding of Korea를 집필하였으며 국제문화정책아카이브 World CP(Cultural Policy)에 수록된 Korean Cultural Policy Profile의 저자이다. 한국에서 2016년 7월에 열리는 국제문화정책컨퍼런스(ICCPR: International Conference on Cultural Policy Research)의 집행위원이다.


아르코 로고

[기사입력 : 2015.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