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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사람

한국 예술행정의 산 증인,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

장지영 (국민일보 기자, 공연 칼럼니스트)
  • 자전 에세이 <공연의 탄생> 출판기념회(2014)
    자전 에세이 〈공연의 탄생〉 출판기념회(2014)
  •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내한공연(2002)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내한공연(2002)
  • 정명훈 카퍼레이드(1974) ©중앙포토
    정명훈 카퍼레이드(1974) ©중앙포토


이종덕(80) 충무아트홀 사장이 1월 15일 퇴임식을 끝으로 공연계 현장에서 은퇴한다. 이 사장은 국내 문화예술계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마당발이자 예술행정의 산 증인이다. 1963년 문화공보부(이하 문공부)에서 공직을 시작한 그는 문공부 정책연구관,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상임이사, 서울예술단 이사장, 예술의전당 사장, 세종문화회관 사장, 성남아트센터 사장을 지냈다.
‘공연계의 대부’, ‘예술행정의 귀재’ 등 그의 별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의 삶은 한국 공연예술의 성장사 그 자체다. 이 과정에서 그가 문화공보부 공무원 시절이던 1974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2위를 차지했던 정명훈에게 김포공항에서 광화문까지의 카퍼레이드를 열어주도록 계획한 것이나, 세종문화회관 사장이던 2002년 강수진이 주역으로 있는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내한공연을 성사시킨 것 등은 유명한 일화다.
당초 그는 2010년 11월 성남아트센터 사장을 끝으로 현업에서 물러날 예정이었다. 그래서 당시 친분 있는 예술계 관계자들과 함께 퇴임식도 치렀다. 예술가들이 앞다퉈 재능기부를 한 덕에 퇴임식은 꽤나 성대했다. 하지만 그는 퇴임 후 두 달 만에 충무아트홀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3년 임기를 채운 뒤 다시 1년씩 두 번 재연임 됐다. 비록 이번에 현장에서 은퇴한다고 하지만 그가 완전히 공연계를 떠난 것은 아니다. 올봄 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 원장 겸 석좌교수에 임명된 그는 내년부터 학생들에게 경험에서 우러나온 예술경영을 가르칠 예정이다.
은퇴를 앞두고, 반세기를 넘긴 그의 예술행정 역사에 대해 솔직히 회고하는 인터뷰를 가졌다.


  • 이종덕(80) 충무아트홀 사장

Q. 이번에는 공연계 현장에서 정말 은퇴하시는 건가요? 그동안 몇 차례 은퇴한다고 했다가 다시 복귀하신 사례가 있어서인지 공연계에선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나도 양심이 있어요. 80세를 넘겨서까지 국민 세금으로 월급 받으면 안 될 것 같아요. 이번엔 진짜로 은퇴합니다. 성남아트센터를 끝으로 정말 은퇴하려고 했는데, 당시 일면식도 없는 중구청장이 찾아와 신임 충무아트홀 사장 자리를 맡아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바람에 맡게 됐습니다. 그리고 임기 마친 후 다시 은퇴하려고 했는데, 만류하는 바람에 2년 더 하게 됐습니다.

Q. 1963년 문공부 주사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는데요. 1983년 정책연구관을 끝으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상임이사로 부임하기까지, 문공부에서 주로 무대예술과 관련한 행정을 주로 맡았습니다. 무대예술과 관련한 업무를 주로 담당했었던 것에 특별한 연유가 있습니까?

처음엔 인기 있는 영화 분야를 하고 싶었지만 ‘유혹 많은 곳은 가지 않는 것이 좋다’는 사촌 매형(당시 문공부 차관)의 말에 무대예술과 인연을 맺게 됐어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매형의 말이 옳았던 것 같습니다. 오로지 40년간 예술 행정가로 종사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가 아닌 무대예술 쪽을 택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내가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영화 파트의 경우 공무원 비리에 걸려 자주 담당자가 바뀌었는데, 만약 제가 영화 담당을 맡았다면 불과 몇 년 만에 공무원을 그만두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당시 무대예술 분야에 있으면서 외국 국빈을 청와대에 모실 때 전통예술을 소개하는 일을 자주 하면서 승진가두를 달렸죠. 덕분에 문공부에서 유일한 문화예술 행정가로 알려지게 됐습니다.


Q. 문공부 시절 한국의 문화예술을 해외에 알리는 역할을 많이 하셨는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1972년 전통춤이 중심이 된 한국민속예술단을 이끌고 4개월간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24개국 투어를 했어요. 뮌헨올림픽 개막식에서도 공연을 했는데, 선수들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못 땄지만 한국민속예술단은 금메달감이라는 평가를 받았죠. 예술단원으로는 인간문화재 김소희·박귀희·한영숙·강선영 등 전통문화계 실력자가 총동원됐는데요. 젊고 무명이었던 이생강·박범훈 등이 대금·피리 등의 반주자로 동행해 짐 나르기 등 허드렛일을 도맡았어요. 이후 이들 예술단원 멤버들과는 절친한 사이가 됐죠. 당시 신용카드가 없을 때라 예술단이 쓸 돈을 모두 현금(총 3억7000만 원)으로 들고 다녔는데, 회계를 맡은 직원이 돈 가방을 버스에 놓고 내렸어요. 그때 막막했었는데, 다행히 다음날 돈 가방을 버스회사에서 찾을 수 있었어요. 지금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순간입니다.

Q. 무용 애호가로 유명하신데요. 성남아트센터 사장 시절엔 성남국제무용제를 만드는 등 무용계와 관련해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지원을 하셨습니다. 언제부터 무용을 좋아하셨나요?

1960년대 중반 딘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이 서울에 왔어요. 당시 최고의 국빈이라 정부 차원에서 접대에 신경을 썼는데, 구고무(九鼓舞) 등 우리 전통춤을 보여주니 “너무 훌륭하다”며 좋아하는 거예요. 우리 전통춤의 우수성을 새삼 실감한 이후 박귀희, 강선영 등 지금은 한국무용 원로가 된 무용가들과 친하게 지냈어요. 전통춤에서 시작된 무용에 대한 관심은 이후 현대무용, 발레로 자연스럽게 확산됐어요.

Q. 그동안 수많은 문화예술 단체의 수장을 해오셨는데요. 해보고 싶으셨는데 못하셔서 아쉬웠던 직책이 있으신가요? 국립극장 극장장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신 적이 있으셨는데요.

내가 그동안 여러 문화예술 단체의 수장을 맡아 왔지만 한 번도 먼저 나서서 하겠다고 한 적이 없어요.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성남아트센터, 충무아트홀 모두 문화부나 서울시, 성남시, 중구에서 임명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공모에 지원해서 어떤 자리에 가고 싶진 않습니다. 돌이켜 보면 국립극장 극장장은 그다지 아쉬움이 남지 않아요. 그러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은 솔직히 아쉬움이 있어요. 문공부를 떠나며 재도약을 하게 된 곳이 바로 위원회의 전신인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었습니다. 상임이사를 6년 가까이 맡으면서 예총 회관을 대학로에 유치하고 마로니에 숲을 공원으로 조성하는 등 여러 일을 했습니다. 지금도 마로니에 공원에 가면 당시 생각이 많이 납니다. 진흥원은 제가 지금의 자리에 올 수 있는 발판이 되어준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2011년 말인가 2012년 초인가 유인촌 장관이 위원회 위원장 공모를 해달라고 먼저 부탁해서 지원했는데, 결과적으로 권영빈 위원장이 됐죠.

Q. 반세기에 걸쳐 예술행정가로 살아오면서 수많은 성과를 남겼습니다. 특히 국내 대표적인 공연장들의 수장을 두루 역임해 한국의 ‘제1호 예술경영 CEO’로 불리는데요. 공연계에선 추진력과 결단력으로 공공 극장 활성화에 앞장선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꼽는 업적은 무엇인가요?

세 가지를 꼽고 싶은데요. 먼저 공연장에 부임할 때마다 후원회를 만든 것을 꼽고 싶습니다.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성남아트센터, 충무아트홀에서 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 첫 월급을 후원회에 먼저 낸 뒤 주변 지인들의 가입을 유도했어요. 공연장을 비롯해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개인 또는 기업 후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이런 후원회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다음으로 예술의전당 사장 시절이던 1996년 전국 공공극장의 연합체인 전국문예회관연합회(지금의 한국문예회관연합회)를 만든 것도 제가 생각하는 중요한 성과입니다. 서울예술단 사장 시절 지방 공연을 다닐 때 지역 문예회관이 얼마나 낙후돼 있는지 체감했습니다. 당시 연간 공연예산이 한 푼도 없는 지역 문예회관도 적지 않았어요. 이후 지역 문예회관들이 한국문예회관연합회의 복권기금사업 등의 도움을 받아 빠르지는 않지만 조금씩 활성화되는 것을 보면서 기뻤어요. 마지막으로 1996년 국제화 시대에 맞춰 아시아태평양지역 공연장들의 교류를 위해 아시아태평양공연예술센터연합회(AAPPAC)를 결성한 것을 꼽고 싶습니다. 당시 제가 호주 측에 처음 제안을 하면서 이뤄졌는데, 지금은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의 주요 공연장들이 많이 가입하는 등 꾸준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Q. 그동안 성과도 많았지만 아쉬운 점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스스로 대처를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공연계 일각에선 세종문화회관 시절 노조 문제를 가장 먼저 꼽던데요.

공공 예술단체 노조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것은 가장 아쉬운 부분입니다. 서울시 사업소 소속에서 재단법인으로 바뀐 세종문화회관의 첫 번째 사장으로 부임한 이후 극장 산하 시립 예술단체 정상화를 추진했어요. 이를 위해 먼저 오디션을 실시했어요. 세금으로 운영되는 시립 예술단 단원들이 예술을 등한시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오디션에 떨어진 서울시향 연주자 9명을 해고했습니다. 그러자 노조가 세종문화회관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벌였어요. 직원들을 시켜서 천막을 치웠더니 이번엔 민주노총이 개입해 더 많은 천막들이 들어섰어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갔다가 돌아오는 중요한 시기였기 때문에 노조와 협상 끝에 9명 단원을 복직시켰습니다. 대신 3년 동안 오디션을 봐서 합격하지 못할 경우 해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후 9명은 결국 오디션에서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노조와 1년 반 넘게 싸움을 했지만,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 설립된 성남문화재단 대표이사 겸 성남아트센터 사장으로 가게 됐어요. 당시 성남시에서 산하 시립단체를 성남아트센터 산하단체로 이관하라고 했지만 거절했습니다. 세종문화회관에서의 쓰라린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공공 예술단체 대부분이 방만하게 운영되면서 공공성과 예술성을 갖추지 못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과거 이들 단체를 설립할 때 공무원들이 예술에 대한 이해 없이 공무원 조직처럼 만든 게 가장 큰 문제였어요. 문공부 시절 이런 공공 예술단체 문제에 대한 정책을 마련했어야 했는데, 그때는 너무 몰랐던 것 같아요. 지금 문화예술계에서 ‘거목’이란 소리를 들으며 나이를 먹었지만, 복마전 같은 공공 예술단체 문제를 후배들에게 떠넘긴 것에 대한 죄책감이 남아 있습니다.

Q. 서울예술단 문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울예술단의 전신인 88서울예술단은 원래 1985년 9월 남북 예술공연단 교환 공연 이후 남북한 문화의 동질성 회복과 문화예술 교류에 대비하고 국가적인 주요 행사를 위해 만들어졌는데요. 당시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어요. 지금 서울예술단은 가무악을 추구하고는 있다지만 정체성 논란에 늘 시달리고 있습니다. 1988~1993년 88서울예술단 단장과 1994~1995년 서울예술단 이사장을 역임하셨는데, 서울예술단의 정체성은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서울예술단은 1985년 남북 교환공연 당시 이북에 대응할 수 있도록 긴급하게 만들어진 단체입니다. 원래 방송광고공사 기금으로 만들어졌는데, 1990년 정부조직법 개정에 따라 문화부 산하가 됐죠. 그리고 재단법인으로 만들고 예술의전당 내부에 자리 잡도록 했습니다. 서울예술단의 정체성과 관련해 제가 있을 당시엔 서울과 지방의 문화 격차 해소를 위해 지방 순회공연과 문화예술 소외층을 찾아가는 탐방공연 등을 많이 다녔습니다. 또 예술가들을 키워내는 산실 역할도 했습니다. 이후 서울예술단 정체성에 대한 비판 여론이 많아지면서 유인촌 장관 시절엔 해단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만 제가 말렸습니다. 적지 않은 예술가들에게 평생의 아픔을 남길 수 있거든요. 어쨌든 서울예술단의 정체성과 관련해 이북에 대응해 국가적인 주요 행사를 치르는 게 지금으로선 맞지 않은 만큼 새로운 목표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Q. 충무아트홀에서 5년간 재직하면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뒀습니다. 최근 〈프랑켄슈타인〉이 대형 창작뮤지컬로서는 엄청난 기록을 써내려가는 게 대표적입니다. 처음엔 공공 극장인 충무아트홀이 뮤지컬 전용극장으로 운영되는 것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입장이셨는데, 점차 바뀌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충무아트홀에 부임한 이후 의무적으로 클래식과 발레를 공연하도록 했습니다. 뮤지컬 전용극장이라는 인식을 벗고 다양한 장르가 공존하는 곳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소극장 오페라 〈리타〉를 제작해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등 클래식 분야에서도 성과를 거뒀습니다. 사실 충무아트홀이 뮤지컬 전용극장이어서가 아니라 대관 위주로 운영되는 극장이라는 고민이 컸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을 제작하며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제작극장으로 거듭난 것도 자랑스럽지만, 창작뮤지컬 육성 사업에서 충무아트홀이 큰 역할을 한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서울뮤지컬페스티벌, 뮤지컬하우스 블랙앤블루, 그리고 충무뮤지컬전문아카데미 등을 운영하는 것은 신인을 발굴하고 스타를 만들어 내는 것이야말로 공공극장의 책무이기 때문입니다.


  • 고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고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Q. 지금까지 살면서 본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누구인가요?

고 김수환 추기경님입니다. 제가 어릴 때는 좀 불량했어요. 학생 시절엔 치기 때문에 싸움도 많이 했고요. 공무원이 된 이후에도 처음엔 안하무인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월남 전쟁이 한창일 때 이미자 씨 등 가수들에게 위문공연 가라고 강요하기도 했었어요. 그러다가 1970년쯤 김 추기경님을 만나면서 변하게 됐습니다. 그분은 스스로를 ‘바보’라고 하면서 모든 문제를 늘 자신의 탓으로 돌리셨죠. 제가 상대방을 존중하는 철칙을 가지는 한편 어눌해 보이는 삶을 추구하게 된 것은 모두 그분 덕분입니다. 이후 세례를 받고 그분을 따라 나자로 마을 돕기에 나서게 됐습니다. 김 추기경님이 혜화동 사제관에 계실 때 가끔 곰국을 끓여서 싸들고 갔을 때 맛있게 드시던 기억이 납니다.

Q. 예술경영과 문화정책 분야의 후배들에게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묵묵히 실력을 쌓다 보면 기회는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인간성과 주변의 신뢰를 쌓으라는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저는 인맥이 큰 재산이라고 생각해 수많은 예술 관련 모임을 만들었는데요.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애정이 그 바탕에 있기 때문입니다. 평생 예술가를 지원하며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이 큰 행복이었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배신을 당한 적도 있지만 제 개인감정보다는 예술가들의 능력을 가장 우선시했습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봉사활동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어요. 당장 내년에 로터리클럽의 세계대회가 한국에서 열리기 때문에 그 준비를 해야 할 것 같고요. 문화나눔재단을 만들어 실력 있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들에게 좀 더 많은 기회를 줄 계획입니다.


아르코 로고

[기사입력 : 2016.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