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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애도되지 못한 슬픔에 대한 연극 〈먼데서 오는 여자〉
(배삼식 작, 김동현 연출)

이경미 (연극평론가)
  • 〈먼데서 오는 여자〉 공연 장면
    〈먼데서 오는 여자〉 공연 장면
  • 〈먼데서 오는 여자〉 공연 장면

여자는 치매를 앓고 있다. 그녀의 지난 시간은 어느 지점은 비어있고, 어느 지점은 비틀어져 있다. 무엇보다 그녀의 시간엔 현재가 없다. 그녀는 지금 자기 옆에 있는 남편을 모른다. 그녀에게 남편은 그냥 과거 어느 시간 속에 드문드문 움직이지 않는 점으로 박혀있다. 신촌 근처 어느 버스 안에서 프러포즈하던 젊은 청년으로, 중동에 돈 벌러 간 남편으로, 그러다 돌아와 이내 더 긴 시간을 나가 있기 위해 다시 떠나던 남편으로. 하여 그녀가 불러내는 시간들은 듬성듬성 떠 있는 섬 같다. 아니면 숭숭 구멍 뚫린 천 보자기 같다. 의당 있어야 할 앞뒤 이음새들이 부재한 시간, 이 시간의 끝자락에 남겨진 그녀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 같다.

l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잊지를 못하는 거야”

배삼식이 쓰고 김동현이 연출한 〈먼데서 오는 여자〉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부부의 회상으로 가득하다. 한적한 공원 한편에서 여자(이연규)는 휠체어에 앉아 쉬지 않고 지난 시절의 편린(片鱗)들을 꺼내놓고, 남자(이대현)는 그런 여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자상하게 응수한다. 노부부가 자아내는 아름다운 서사의 서정성이 관객의 가슴을 애잔하게 파고든다. 그러나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는 아프다. 정신없이 흘려보낸 자신들의 젊은 시간들로 인해 아프고, 멈춰버린 시간 끝자락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 때문에 또 아프다. 무엇보다 그녀가 잊어버린 그녀 시간 속에 켜켜이 쌓인 상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아프다. 결국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잊지를 못하는 거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과 잊지 못한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피에르 노라(Pierre Nora)의 말대로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소환하는 일, 즉 현재의 시점에서 지난 과거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이때 망각은 기억이 어느 한 지점에 고착되거나 심각하게 변형, 왜곡되는 것을 막아 기억의 전 과정을 유연하게 만들어 준다. 그런 점에서 망각은 기억의 반대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기억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전제조건이자 동반 요소다. 이처럼 망각이 기억이 활성화되는 전제조건이라면, 이 망각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은 애도다. 애도란 개인이 사건을 타자화시킬 수 있고 이를 통해 객관적으로 응시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일이다. 애도를 통해 개인은 과거의 시간들을 변형시켜 자기 것으로 만들며,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한 것을 대체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러나 과거의 시간들이 적절한 애도와 망각을 통해 현재적 관점에서 재구성되지 않는다면, 기억은 본래의 활력을 잃고 특정 사건, 특정 시간 안에 고착된 상태로 머물게 된다. 이처럼 집단의 무의식 속에 꼭꼭 눌려진 상태로 갇혀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억압’된 기억을 우리는 외상, 즉 트라우마라 이야기한다.
여자가 치매를 앓게 된 것도 사실은 트라우마 때문이 아니었을까. 과거의 어떤 사건이 미처 애도되지 못한 채 그녀의 무의식 안에 고착되어 있어 그렇게 아무것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극단의 억압 상태에 빠져든 것은 아닐까. 그 엄청난 통증 앞에서 그녀 스스로 모든 문을 닫아버리고 치매라는 또 다른 망각 속으로 빠져든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무엇을 잊지 못한다는 걸까.

l 여자의 몸 위로 흐르는 우리의 시간들, 트라우마

감정조차 증발된 투명한 모습으로 여자가 듬성듬성 과거의 시간들을 불러낸다. 한국 전쟁 당시 자신을 나무에 묶어 놓고 피난 가던 엄마, 전쟁 직후 서울 어느 집 담벼락 아래 세워놓고 살았던 옹색한 천막, 그 천막 앞에서 널브러져 죽은 이름 모를 상이용사의 시체가 그녀를 통해 불려 나온다. 어느 날 밤 웬일인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던 엄마, 이후 그 엄마의 불행한 죽음, 보육원으로 보내진 동생과 서울에서의 식모살이도 그녀가 불러내는 시간 속에서 점점이 떠오른다. 동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질렀던 도둑질, 동생으로부터의 도피, 청계천에서의 미싱사 생활, 그리고 파독 간호사…. 그런 그녀의 시간은 이후로 남편의 존재, 그의 시간과 함께 섞인다. 월남에 파병되었다 돌아온 남편은 포클레인 기사였다. 그는 중동에 돈을 벌러 나갔고, 그렇게 들어왔다 다시 나가기를 반복했다. 그녀에게 이 시간에 대한 기억은 일제 카메라, 김포공항, 집 계약서, 마당에 만든 조그만 화단과 꽃 같은 것으로 모아져 솟아오른다.  
관객이 여자의 그 파편적 기억의 시간을 통해 개인의 삶의 이력을 넘어서는 한국 사회의 지난 연대기임을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자는 그저 치매를 앓는 노년의 어느 여인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하나로 그러모아 안고 있는 집합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제까지 우리 모두 여자처럼 살았다. 한국 전쟁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우리의 어머니가, 누이가 그렇게 살았다. 우리 아버지가, 우리 형이 그렇게 살았더랬다. 여자는 곧 우리, 우리의 역사다. 그렇게 그녀의 시간 속에서 우리의 시간들이 함께 묻어나기 시작할 즈음, 갑자기 여자가 격하게 몸부림친다. 바로 하나뿐인 딸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지점이다. ‘언젠가는’이라는 막연하지만 간절한 미래의 어느 시점을 향해 묵묵히 견뎌냈던 여자의 시간들은, 2003년 대구지하철 사고가 일어났던 그 시점, 그때 딸의 죽음과 함께 완전히 멈춰버렸다.

  • 〈먼데서 오는 여자〉 공연 장면

    (사진: 코르코르디움)
이제 남자만 무대에 홀로 남아있다. 그는 꽃다발을 들고 딸이 묻힌 공원을 찾았다. 하지만 딸의 묘지는 없다. 나무 옆 벤치로부터 몇 발자국 떨어진 지점, 거기가 딸이 묻힌 곳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위에 사람들이 돗자리를 펴고 한가한 휴일의 오후를 즐기고 있다. 여자가 아픈 것은 비단 딸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딸의 그 죽음이 제대로 애도되지 못한 것 때문이다. 약속과 달리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딸의 죽음을 잊었다. 그녀의 고통을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치워버렸다. 이처럼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딸의 죽음은 여자를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기억할 수 없는 공간 속으로 밀어 넣었다. 여자의 이전의 시간은 심각하게 일그러지고 그 이후의 시간 또한 여자의 의식 속에서 깨끗이 증발되어 버렸다. 왜 여자가 치매를 앓게 되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는 순간, 관객이 느끼는 통증은 더 커진다. 여자의 시간이 우리의 역사라면, 여자의 트라우마는 바로 우리 사회의 트라우마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사건이 제대로 애도되지 못한 채 잊혀지려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 감정적으로 격하게 출렁거리는 것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대구 지하철 참사 및 그 이후의 미흡한 처리 과정에 대해 남자가 길게 설명하는 부분은 이것이 지시하는 대상이 너무나 분명한 탓에 과감히 덜어내도 되는 불필요한 장면 같다. 이처럼 관객보다 앞서서 연극의 서사를 극장 밖 현실과 연결시키려는 몇몇 시도들은, 결과적으로 관객을 감상적인 연대 공동체로 만들어버리는 점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희곡의 언어는 관객이 인물에게 몰입해 극적 공감을 얻어내기에 충분할 만큼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연출의 시선은 극 중 남자의 시선이 그러하듯 여자의 몸에 각인된 통증을 조용하고 객관적으로 응시한다. 이대현과 이연규는 감상성과 사회적 현실성 사이에서 팽팽하게 균형을 유지하며 공연을 이끌어간다. 덕분에 관객은 여자에 대해 오로지 감상적으로 몰입하지 않고, 그녀를 통해 우리, 우리의 역사와 대면할 수 있는 거리가 생긴다. 그렇게 해서 이 연극은 지나간 젊음과 다가올 죽음의 중간 지대에 노년의 삶을 놓고, 결국에 가서는 아름답게 미화시키곤 하는 다른 연극의 흔한 통속성을 간단히 털어버린다. 여자, 그리고 남자는 하나의 개인이 아니라 그 자체가 문화학에서 말하는 기억의 장소이다. 그들은 일종의 거울처럼 우리의 현대사, 그리고 그 안의 상처들을 관객을 향해 되비춰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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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4.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