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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3인의 개인전    
권경환-마르기 전 규칙, 류장복-투명하게 짙은, 진시우-스타카토 블랙 
2014.10.17~12.7 일민미술관

안소연 (미술비평가)
  • 권경환의 전시 전경
    (왼쪽부터)권경환, 류장복, 진시우의 전시 전경
  • 류장복의 전시 전경

  • 진시우의 전시 전경



일민미술관에서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전시로 작가 3인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권경환, 류장복, 진시우가 그들이다. 권경환은 《마르기 전 규칙(The Rule before Drying)》, 류장복은 《투명하게 짙은(Transparent but Dense)》, 진시우는 《스타카토 블랙(Staccato Black)》이라는 개별적인 전시 제목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을 한데 묶는 제목은 따로 없다. 전시 제목과 마찬가지로, 작품이 놓인 물리적 공간 또한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서 서로 방해하거나 참조할 일도 크게 없어 보인다. 각각 명백히 독립적으로 보이는 세 개의 전시는 기획 의도에서 “회화 혹은 회화적 미술이 대중과 소통하는 방식”에 주목하고 있음을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에서는 “회화 혹은 회화적 미술”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보이지 않지만, 대신 세 명의 작가에게서 굳이 공통점을 찾아보자면 모두 자신을 둘러싼 일상에 대한 독특한 사유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박적일 만큼 집요하게 일상의 주변을 맴돌며 사유하는 이들 작가는, 자신이 구축한 시각적 언어로 세계와의 소통을 시도한다. 결코 객관적이지도 명료하지도 않은 세 작가의 의미심장한 태도는, 비일상적인 어투로 일상과 그 이면을 이야기하려는 오늘날의 동시대 작가들을 대표한다.  

| 권경환, 마르기 전 규칙

권경환은 이번 전시 《마르기 전 규칙》에서,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지시와 규칙에 대해 사뭇 진지한 사유의 과정을 보여준다. 작가는, 지시의 정당성과 뚜렷한 목적성도 모른 채, 성실히 규칙을 이행해 나가는 일상의 군중 속에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대입해 본다. 먼저, 철사로 제작해 한 눈에도 불안정해 보이는 네 개의 의자와 각각 그 앞에 지시적인 텍스트를 갖다 놓은 〈의자에 앉는 방법〉(2014)을 보자. 상식적으로는 좀처럼 그 위에 걸터앉을 엄두가 나지 않지만, 흰색의 A4 용지에 프린트한 텍스트는 관객에게 그 위에 앉을 수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강요한다. 예를 들어,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당신은 가능성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바라보며 자신의 몸과 정신을 바로잡으면 당신은 여기에 앉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절대 당황하지 않습니다” 등의 교조적인 문구 어디에도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 이 행위의 방식에 대한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결국 지시에 대한 불신을 감추지 못한 자는 스스로 일상의 낙오자로 물러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부조리한 지시에 대한 합리적 선택은 애초에 무의미한 게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의 〈변화와 통일, 균형과 대비를 통해 팽팽하게 비닐봉지를 펼치시오〉(2014)는 좀 더 미적 확신에 대한 불완전한 지시와 맹목적인 수행의 과정을 드러내고 있다. 권경환은 그가 자신의 작업을 돕는 두 명의 어시스턴트와 나눈 대화록을 공개했다. 투명한 비닐봉지를 팽팽하게 펼치기 위해 작업에 동원된 이들은 작가가 제시한 불완전한 지시에 따라, 즉 변화와 통일, 균형과 대비를 통해 팽팽하게 비닐봉지를 펼치라는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돌발적인 질문과 실패의 흔적이 발생했더라도 최종적으로 임무를 완수했다는 확신 뒤에 과정은 모조리 감춰질 게 분명하다. 하지만 투명한 비닐 뒤에 살며시 드러나는 비정형의 지지대는 작가의 지시가 함의하고 있는 태생적인 모순을 여실히 드러내고 만다. 그것은 견고한 규범으로 마르기 전의, 아니 마를 수 없는 약간 무른 그 무엇쯤이 될 터이다. 명쾌한 해답도 없고, 뚜렷한 방법도 없고, 합당한 목적도 없어 보이는 일상의 불완전한 지시와 규칙은 그가 하는 “불순한” 미적 행위에 대한 사유로 그렇게 이어진다. 권경환은 15세기 중세 유럽의 도덕극(Morality Plays)인 〈에브리맨(Everyman)〉을 참고하여 〈부서지기 쉬운 조각〉(2014)을 제작했다. 뜻밖에도 무대 위 애매한 조각들(pieces)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시가 없다. 생긴 모양새로 봐서는 몸에 착용할 것을 강요하지만 왜,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규범이 제시되지 않은 채, 다만 부서지기 쉬운, 즉 마르기 전의 극적인 변화를 무심하게 연출해 놓은 듯하다.

| 진시우, 스타카토 블랙

한편 진시우는 《스타카토 블랙》이라는 제목으로, 일상을 향한 자신의 시선을 강하게 어필한다. 악보에서 스타카토라는 기호가 “한 음씩 또렷하게 끊어 연주하라”는 표시이므로, 언뜻 보기에도 그의 시선은 연속적이지 못하고 다소 분절적이지만 강렬한 음가(音價)를 띄고 있는 게 사실이다. 옥인콜렉티브의 멤버로 활동해온 진시우는 이번 개인전에서, 그가 평소에 기록해둔 짧은 메모와 일상에 얽힌 단편적인 기억들을 모티브로 하여 작업을 이어갔다. 예컨대, 〈깊이도 넓이도 잴 수 없는 심오한 질문〉(2014)은 “나는 왜 후라이드 치킨을 좋아하는가? WHY DO I LOVE FRIED CHICKEN?”라는 문장이 촘촘히 프린트된 박스 테이프를 쌓아둔 설치 작업이다. 작가의 말마따나 밑도 끝도 없는 이 질문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리고 붉은 색 박스 테이프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조차 이해하기 힘들다. 분명한 것은, 작가가 일상의 어느 한순간에 기록한 메모에서 쏟아져 나온 이 질문이 사후적으로 비논리적이거나 비상관적인 이미지들과 뒤섞여 다시 되살아났다는 것이고, 그것이 그의 작업이다.

전시장에서 시선보다 다소 높게 걸어놓은 〈Untitled(Displaced)〉(2011)는 한때 그가 경험했던 일상의 기억을 관객과 공유한다. 그는 나무판에 별 모양의 야광 스티커로 “DARKSTAR”라는 글자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그가 쓴 글에 따르면, 그는 암스테르담의 요르단에 체류하던 중, 어두운 밤에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다가 그동안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작은 얼룩들을 발견했다. 불을 켜고 자세히 올려다보니 흰색 페인트로 가려진 야광 별 스티커였다. 그 스티커들을 모두 떼어내고 나니 흰색 천장에 검은색 별 자국이 남게 됐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가 다시 나무판에 붙여놓은 스티커를 떼어내는 순간, 더 이상 빛을 내지 않는 어두운 별(DARK STAR, 암흑성)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미 형광등 불빛에서 빛을 잃은 야광 스티커가 그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진시우의 작업은 일상에서 온 유머와 수수께끼 같은 자신의 상상력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설치 작업 〈무제(고꾸라져 머리를 바닥에 찧고 나서야 산 넘어 산이라는 것을 알았다)〉(2014)와 사운드 작업 〈03”22’8〉(2014)는 그가 작업 과정에서 주목하고 있는 이미지(혹은 오브제)와 텍스트의 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된다. 3분 22초 8분 동안 들려주는 이야기의 내용은, 달팽이가 기울어진 칼날 위를 기어 올라가다가 끝내 칼끝에서 갈라져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운드를 듣는 내내 관객의 시선은, 한쪽은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고 또 다른 쪽은 바닥에 펼쳐진 노란 비닐 장판과 몇 개의 물건들이 연출하고 있는 모호한 장면을 쫓게 된다. 서로가 연루된 듯하지만, 그렇다고 정확한 증거도 없다. 그가 일상에서 남긴 메모와 그것을 시각적인 형태로 풀어내는 과정에는 늘 그렇게 피할 수 없는 간극이 발생한다.


  • 류장복 2013년 6월8일 3시5분
    류장복 〈2013년 6월8일 3시5분〉

| 류장복, 투명하게 짙은

류장복에게 이번 전시 《투명하게 짙은》은 21번째 개인전이고, 그는 앞선 두 명의 작가들과는 사뭇 다른 전시 풍경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자신의 일상에 대한 사유와 기록이라는 점에서만큼은 서로 연대하고 있다. 특히 중견 작가 류장복은 회화라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고집하면서 제한적인 캔버스 틀 안에 일상에 대한 단상을 능숙하게 기록해 나간다. 세계를 관찰하고 그것을 기록한다는 점에서 언뜻 보면 사생(寫生)에 가깝지만, 사실 그는 보이는 풍경을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작가로서 자신이 깊이 화면에 개입해 임의로 그것을 재구성하거나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을 크게 이입하기도 한다. 예컨대, 그는 탄광촌으로 잘 알려진 철암에 한동안 머무르면서 그곳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또한 자신의 작업실 창문을 매개로 하여 보여지는 외부 세계를 반복해서 캔버스에 기록해두려고도 했다. 그러는 동안, 그가 본 어제의 풍경과 오늘, 내일로 이어지는 동일한 풍경들은 결코 재현적 완결성을 뽐내지 않는다. 작품 제목을 보면 〈2014년 6월 8일 9시 43분〉(2014), 〈2014년 6월 28일 24시 32분〉(2014), 〈2014년 6월 29일 오후 1시 50분〉(2014)으로 매우 구체적인 시공간의 알리바이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캔버스에 그려진 창밖의 풍경은 마치 다른 장소라도 되는 것처럼 분명 다르다. 아마도 창밖의 풍경은 그가 그날 접한 조간신문, TV 저녁 뉴스, 누구와의 전화통화 등 외부 세계에서 무방비 상태로 전해온 또 다른 풍경의 잔상과도 같을 것이다.  

류장복도 글을 쓴다. 은유와 묘사가 가득한 그의 시적 언어는 그림과 어우러져 상보(相補)적인 관계를 지향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화폭 앞에서 나는 감각을 기억하거나 기억을 감각한다. 응시의 눈으로 압축된 이미지는 유화로 옮겨지는 과정을 통해 관조의 눈으로 증폭된다. (중략) 그림의 표면에 맺히는 잔상은 사물 대상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순간의 이미지를 지속적인 순간의 두껍고 짙은 이미지로 자라나게 한다. (중략) 나는 기억의 이미지를 눈앞에 불러와 감각한다. 그것은 그림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글로 써지기도 한다. 주관적으로 왜곡된 이미지가 그림에 남고, 비문법적으로 퇴행한 글은 그저 글씨가 된다.”[전시도록 중 작가노트에서 인용]    

이처럼 그의 글과 그림은 일상에 대한 사유의 흔적이자 그것의 섬세한 기록이지만, 동시에 일상의 이면을 일깨우기도 한다. 그것은 앞서 두 명의 작가에게서 느꼈던 것처럼, 일상이 지닌 가장 비일상적 지점에 대한 깊은 의문과 통찰로 가능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권경환의 《마르기 전 규칙》, 류장복의 《투명하게 짙은》, 진시우의 《스타카토 블랙》은 3인의 작가가 각기 다른 환경과 조건 속에서 일상을 사유하는 불특정한 방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제법 흥미롭다.


  • 권경환 변화와 통일, 균형과 대비를 통해 팽팽하게 비닐봉지를 펼치시오
    권경환 〈변화와 통일, 균형과 대비를 통해 팽팽하게 비닐봉지를 펼치시오〉
  • 진시우 깊이도 넓이도 잴 수 없는 심오한 질문
    진시우 〈깊이도 넓이도 잴 수 없는 심오한 질문〉

(사진: 일민미술관, 안소연)


아르코로고

[기사입력 : 2014.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