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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세계 최대의 클래식 음악축제

지휘자 못지않은 진지함으로 한 장 한 장 악보를 함께 넘기며 음표를 쫓는 청중과 무대 앞 바닥에 주저앉아 와인을 홀짝이며 분위기를 즐기는 청중을 한 공간에서 만나기란 매우 드문 일이다. 입장권을 구하기 위해 하루 종일 줄을 서 있었다고 하면, 축구 경기나 록 콘서트를 떠올릴 것이다. 5,000여 명이 두 달 간 매일같이 클래식 공연을 보러 온다는 사실 또한 믿기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한여름의 클래식 음악축제, ‘BBC 프롬스(이하 프롬스)’에서 매해 일어나고 있다.
올해로 120주년을 맞은 프롬스는 ‘세계 최대의 클래식 음악축제’라는 수식어를 자랑한다. 이는 1895년 프롬스를 처음 기획한 로버트 뉴만의 의도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는 저렴한 티켓과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통해 클래식 음악 관객을 양성하고자 했다. 이후 1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프롬스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주 무대였던 퀸스홀이 2차 세계대전 중 폐허가 되어 현재의 로열 알버트홀로 대체됐고, 청중과 기술의 변화로 인해 공연의 형식과 전달 방식 역시 발전했으며, 책임자와 스폰서는 물론 메인 오케스트라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그러나 이런 변화와 굴곡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것은, 가능한 한 많은 이들에게 음악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프롬스의 단순한 기본 원칙이다. 올 한 해 총 관객 30만 명, 88%의 객석 점유율, 주 공연장에서 이뤄지는 76개의 공연 중 절반 이상이 매진이라는 결과만 놓고 보아도 ‘세계 최대’의 클래식 음악축제라는 말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알게 된다. 멸종 위기의 공룡으로 비유되는 클래식 음악, 그들만의 클래식 음악이 어떻게 모든 이들의 축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을까?

l 그냥 편하게 오세요

프롬스는 언제든 편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 술 한 잔 할 수 있는 동네 펍(Pub) 같은 공연이다. 술을 잘 몰라도 바텐더가 눈치 주지 않고, 가게 안이 늘 북적하니 단골이든 처음 찾은 손님이든 쉽게 다른 이들과 어울릴 수 있다. 동네 펍이면서도 세계 최고의 와인 또한 빼놓지 않고 구비되어 있어 취향과 주머니 사정에 크게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 실제로 프롬스 공연장에서는 낯선 이들과 말을 섞는 일이 무척 자연스럽다. 50년째 공연장을 찾고, 프롬스 기간이면 일주일에 서너 번씩 음악을 들으러 오는 하드코어 관람객부터 클래식 음악 공연 자체를 처음 와본다는 사람까지 관객의 스펙트럼이 무척 넓다.
프롬스는 8주에 걸쳐 90여 개의 크고 작은 공연들이 각기 다른 성격의 세 장소에서 펼쳐진다. 대부분의 주요 공연이 열리는 로열 알버트홀, 실내악 등 보다 작은 규모의 공연을 위한 1,000석 규모의 카도간홀, 그리고 공원에서 열리는 야외 공연 〈프롬스 인 더 파크(Proms in the Park)〉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프롬스가 ‘세계 최대'라는 수식어를 사용할 수 있는 데는, 주 무대인 로열 알버트홀의 역할이 크다.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 알버트 공을 기리기 위해 지은 이 홀은 일반 클래식 콘서트홀의 4배 정도 되는 크기로 6,500여 명을 수용(좌석 5,272석, 입석 1,400명)할 수 있는 대형 다목적홀이다. 평소에는 콜드플레이와 같이 대규모의 관중을 동원할 수 있는 록 밴드가 콘서트장으로 사용하거나, 태양의 서커스단이 줄을 타기도 하고, 심지어 국제 볼룸 댄싱 대회 등의 스포츠 행사가 이뤄지기도 한다. 이러한 용도와 크기의 홀이다 보니, 이곳이 프롬스의 클래식 음악을 끌어안기까지는 많은 음향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 끝에 설치된 하얀 음향판들은, 이제 ‘비행접시’란 애칭으로 불리며 로열 알버트홀의 새로운 명물로 사랑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6,000명의 관객들이 한 공간에서 집중할 때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다른 어느 공연장에서도 경험하기 힘든 것이어서 작은 음향적 결함 정도는 기꺼이 감수하게 만든다. 무대에 오페라가 올려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홀 전체가 일제히 천천히 넘어가는 리브레토(오페라 대본집)의 하얀 페이지로 가득한데, 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숙연한 기분이 든다.

공연의 가격대도 각자의 주머니 사정에 맞추어 고를 수 있다. 모든 공연은 총 8개의 카테고리로 나뉘어 판매되는데 가장 낮은 카테고리의 최고가 티켓이 38파운드로 가장 높은 카테고리의 그것(95파운드)보다 3분의 1 이하의 가격이다. 무엇보다도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프롬스의 노력은 10년째 5파운드에 판매되고 있는 1,400장의 입석표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특히나 이중 500석은 공연 두 시간 반 전부터 판매를 시작하는데, 이러한 전통이 또한 진풍경을 자아낸다. 인기 공연이 올려지는 날, 로열 알버트홀 앞은 새로운 아이폰 출시일의 애플 스토어 앞을 방불케 한다. 이 5파운드의 프롬스 티켓은 시즌 티켓, 절반 시즌 티켓, 주말 티켓 등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고 시즌 티켓의 경우, 사실상 공연 당 2.25파운드, 즉 영국 지하철을 한번 타는 가격으로 세계 최고의 공연들을 무대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된다.
공연 시간은 일반적인 저녁 7시 전후 외에도 ‘늦은 밤’이라는 타이틀로 밤 10시 이후에 시작하는 등 탄력적으로 운영된다. 실제로 이런 환경에서 돈이 없거나 시간이 없어서 프롬스를 찾지 못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전략적인 가격과 효율적인 공연 시간의 조합으로 낮아진 문턱과 다양한 장르의 실험적인 무대는 넓은 관객층을 포용하는 저력이 된다.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고 베를린 필이 연주하는 마태 수난곡, 도이체 오퍼 베를린의 살로메와 같은 정통 클래식 음악부터 팻 샵 보이즈, 루퍼스 웨인라이트, 팔로마 페이스 등의 무대까지, 클래식 음악이 프롬스의 중심이지만 그에 제한되지는 않는다.
한편, 프롬스는 공연 형식에서도 꾸준한 실험을 계속하는데, 2012년 영국의 클레이 애니메이션 〈월레스와 그로밋〉의 감독 닉 파크와 음악 감독 줄리안 노트가 프롬스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월레스와 그로밋의 음악적 경이(Wallace & Gromit’s Musical Marvels)〉가 대성공을 거두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연주되는 하나의 문화상품으로 자리매김했다. 2013년에는 영국의 장수 드라마 〈닥터 후(Doctor Who)〉의 50주년을 맞아 ‘닥터 후’를 주제로 한 무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l 지극히 영국적인…. 영국적인?

두 달에 걸친 대장정의 끝은 ‘프롬스의 마지막 밤(Last night of the Proms)’이다. 영국 전역뿐 아니라 세계로 생중계되는 이날 공연은 그 인기가 상상을 초월한다. 당연히 티켓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 돈이 있다고 해서 티켓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5회 이상의 프롬스 공연을 본 관객에게만 추첨을 통해 티켓 구매의 기회가 주어진다. 가면무도회를 연상시키는 장난스러운 복장의 관객도, 턱시도를 잘 차려입은 관객도 공연장을 날아다니는 풍선과 깃발만큼이나 축제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이 즐거운 축제의 백미인 동시에 논란의 중심은 후반 20여 분에 걸친 관객의 합창이다. 음악이 홀을 메우기 시작하면, 청중들은 일제히 벌떡 일어나 깃발을 휘두르며 목청껏 합창에 참여한다. 문제는 이 메들리의 주를 이루는 노래들이 순수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따라 부르기에는 석연치 않은 가사의 곡이라는 점이다. 〈룰, 브리타니아!(Rule, Britannia!)〉, 〈예루살렘(Jerusalem)〉, 〈희망과 영광의 나라(Land of hope and glory)〉 등은 영국에서 제2의 애국가로 간주되거나, 육·해군이 즐겨 사용할 정도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내용의 노래이다. 이 곡들은 호전적인 가사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인’의 정체성을 각인시키는데 도움을 주며 프롬스의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다양한 뿌리와 역사를 지닌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음악가로 무대에 서고, 관객으로 객석에 참여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전통이 많은 이들에게 불편한 감정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세계인의 순수한 음악 축제로서 프롬스의 발전에 걸림돌이 될뿐더러, 심지어 정치적 역학 상황에 따라 부적절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걸프전 참전이 임박했던 1990년, 내정된 지휘자 마크 엘더가 이 같은 문제를 지적하며 프로그램의 변경을 요청했을 때, 프롬스 측은 단칼에 그 제안을 거절하는데 그치지 않고 아예 지휘자를 교체하며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올해 프롬스의 라스트 나이트는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결정짓는 투표 닷새 전에 이뤄졌다. 런던이 〈룰, 브리타니아!〉를 부르며 유니언 잭을 휘날릴 때, 동시간에 진행된 스코틀랜드 공연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It’s time to say goodbye(작별할 때야)〉와 〈World in Union(화합하는 세상)〉이 무대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