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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통신

[일본] 지방 미술관의 한계를 참신한
공동 기획으로 뛰어넘다

장지영 (국민일보 기자)
  • 시즈오카-타카노 아야 정령선을 타고
    시즈오카-타카노 아야 〈정령선을 타고〉
  • 일본 근대의 소녀 잡지들
    일본 근대의 소녀 잡지들
  • 벽에 걸린 미인화와 그 앞의 피규어들
    벽에 걸린 미인화와 그 앞의 피규어들

일본은 한국보다 지방자치제의 역사가 길다. 그래서 문화예술의 수도권 집중화 현상이 한국에 비하면 덜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역시 지자체의 재정 자립도가 낮은 탓에 지방의 문화예술 시설은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예를 들어 지방 미술관의 경우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의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처럼 세계적 명성을 얻으며 개관 10년 만에 누적 입장객이 1천4백만 명을 돌파하는 등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은 성공사례도 있지만 대부분 시설을 유지하기 급급한 수준이다.
그런데 최근 아오모리 현립 미술관, 시즈오카 현립 미술관, 시마네 현립 이와미 미술관 등 3개의 지방 미술관이 공동으로 기획한 전시가 대단한 성공을 거두며 주목받고 있다. 2014년 7월 막을 올린 뒤 2015년 2월까지 세 미술관을 돌며 전시 중인 《미소녀의 미술사》 전이다. 전시회가 열리는 지역은 물론이고 일본 각지에서 몰려드는 관객들로 세 미술관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앞서 2010년 7월부터 2011년 1월 《로봇과 미술》 공동 기획전으로 히트친 세 미술관은 두 번째 공동 기획전마저 성공시키며 지방 미술관의 롤모델로 떠올랐다.


l ‘로봇과 미술’부터 ‘미소녀의 미술사’까지


우리나라로 치면 도립 미술관에 해당하는 세 현립 미술관이 공동으로 전시회를 기획하게 된 것은 각각의 미술관에 근무하는 큐레이터 3명 때문이다. 아오모리 현립 미술관의 쿠도 타케시, 시즈오카 현립 미술관의 무라카미 타카시, 시마네 현립 이와미 미술관의 카와니시 유리가 그 주인공. 주류 미술사에서 다루지 않는 박스아트(프라모델 상자에 그려진 그림)나 애니메이션 등 서브컬처(하위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이들은 2007년 연구 모임을 시작한 뒤 아예 세 미술관의 공동 전시회까지 기획하게 됐다. 첫 공동 기획은 2010년 막을 올린 《로봇과 미술-기계와 신체의 비주얼 이미지》 전이었다.
일본은 세계 최고 수준의 로봇기술을 보유한데다 로봇에 대한 국민의 사랑이 큰 것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산업 및 의료 현장에서 로봇 사용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을 뿐만 아니라 만화·애니메이션 분야에서 로봇을 소재로 한 수많은 작품이 나왔다. 특히 〈철완 아톰〉을 시작으로 사람의 모양을 한 ‘휴머노이드 로봇’을 소재로 한 만화·애니메이션은 일본 고유의 콘텐츠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이런 로봇 콘텐츠는 미술을 비롯한 예술 장르에서도 즐겨 다뤄지면서 로봇과 인간의 신체 결합이라는 독자적인 전개를 보여줬다.
《로봇과 미술》 전은 1920년대 일본에서 처음으로 로봇의 개념이 소개돼 수용되는 과정의 SF소설 삽화와 광고 전단은 물론 20세기 후반 〈철완 아톰〉, 〈기동전사 건담〉 등 로봇 만화 및 애니메이션 융성기의 자료들 그리고 20세기 말부터 지금까지 로보틱스(로봇학)와 관련한 미술 작품 등을 집대성해 놓았다. 로봇과 미술의 관계에 대한 역사를 소개하면서 그 문화사적 의의를 묻는 이 전시회는 당시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관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쿠도 타케시는 당시 좌담회에서 “미술관은 서브컬처와 순수미술을 분리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순수미술에는 관객이 오지 않아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이분법이다. 서브컬처와 순수미술로 굳이 나눌 필요가 없을뿐더러 관객을 오게 하기 위해 둘을 섞는 것도 재밌다.”고 밝힌 바 있다.   
《로봇과 미술》 전이 끝난 이후 세 미술관의 큐레이터는 아예 공식적인 연구 단체 ‘토리메가 연구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세 사람 모두 안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름이 ‘토리플 메가네(3개의 안경을 뜻하는 일본어 표현)’를 줄인 토리메가가 됐다고 한다. 이들은 각각의 미술관의 정보 및 서로의 관심 분야를 꾸준히 공유한 끝에 2014년 《미소녀의 미술사-우키요에부터 팝컬처, 현대미술로 보는 소녀의 모습》이라는 획기적인 공동 전시회를 열었다.
미소녀는 원래 예쁜 소녀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현대 일본 문화의 특징적인 모티브 가운데 하나다. 수많은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캐릭터 문화, 예능에서 빈번하게 소비되는 미소녀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다. 속옷이 보일 듯 말 듯한 짧은 스커트, 볼륨있는 몸매와 대비되는 귀여운 얼굴 등 미소녀 캐릭터는 처음엔 비주류 문화에서 인기를 얻었지만 점차 확대돼 지금은 일본 대중문화에서 가장 잘 팔리는 대상이 됐다.
원래 소녀라는 개념이 일본에서 정착된 것은 근대시대 학교 제도의 정비에 따라 여자 학생이라는 새로운 신분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특히 20세기 초 출판문화의 발달 속에서 소녀 잡지들이 잇따라 창간되면서 일반화됐다.
물론 근대 이전에도 소녀에 해당하는 젊은 여성이 미술로 표현돼 왔다. 《미소녀의 미술사》 전은 미인도가 활발하게 제작된 에도 시대(1603~1867)부터 소녀가 탄생한 근대를 거쳐 미소녀가 미디어를 떠들썩하게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녀의 이미지를 탐색함으로써 일본인이 소녀라는 존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돌아봤다.
출품 작품으로는 에도 시대 우키요에(채색 판화)로부터 근대에 융성한 미인화, 소녀들 마음을 사로잡은 일러스트풍의 서정화(叙情畵), 데즈카 오사무의 〈리본의 기사〉 등 2차 세계대전 이후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 피규어 같은 캐릭터 문화 그리고 ‘아시아의 앤디 워홀’로 불리는 무라카미 다카시의 〈식스 프린세스: 전투태세〉 등 소녀 이미지를 활용한 현대미술까지 3백여 점의 작품이 준비됐다. 무라카미 타카시는 “미소녀는 현실이 아니라 이념적인 존재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공동 환상으로서 그 형태가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전시회 테마를 설명했다.  


  • 토리메가 연구소 (왼쪽부터)쿠도 타케시, 무라카미 타카시, 카와니시 유리
    토리메가 연구소
    (왼쪽부터)쿠도 타케시, 무라카미 타카시, 카와니시 유리

l 21세기 일본 문화정책의 화두는 ‘지역’

미소녀라는 개념을 일본 미술사의 틀에서 재구축한 《미소녀의 미술사》 전은 앞서 《로봇과 미술》 전보다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세 미술관 가운데 가장 먼저 전시회가 열린 아오모리 현립 미술관의 경우 전시 기간인 7월 12일부터 9월 7일까지 두 달도 안 되는 동안 3만 4천여 명의 관객이 찾았다. 아오모리 현립 미술관 역사상 전시 기간 당 평균 관객으로는 역대 최다였다.  
도쿄 가 아닌 지방에서 개최됐지만 이 전시회는 2014년 하반기 일본 미술계를 강타했다. 언론에 여러 차례 대서특필 됐으며 전시회를 기획한 세 큐레이터들은 각종 심포지엄 등에 단골로 초청됐다. 주류 미술계가 다루지 않던 전시회 테마도 흥미롭지만 지방 미술관들이 서로 협력해서 전시회를 기획하고 개최한 것은 일본에서도 전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일본 지방 미술관의 경우 자체 기획 전시회를 열기에는 예산이나 인력, 컬렉션 등 여러 면에서 힘에 부치는 편이다. 그래서 도쿄의 대형 미술관이 주최하는 전시회의 지방 투어에 참가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상 전시 공간을 빌려주는 데 그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토리메가 연구소를 주축으로 한 세 미술관의 공동 기획은 지방에서도 얼마든지 매력적인 전시회를 스스로 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세 미술관이 힘을

모은 덕분에 혼자 전시회를 치르는 것보다 예산이 훨씬 적게 들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상품들이 불티나게 팔려 만만치 않은 수익까지 얻었다. 예를 들어 전시회 책자는 아예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는데, 너무 잘 팔리는 바람에 여러 차례 재인쇄에 들어가야 했다.
토리메가 연구소의 카와시니 유리는 최근 좌담회에서 “지금은 경제도 문화도 도쿄에 집중돼 있다. 그래서 도쿄에 사는 사람들은 무엇이든 도쿄에서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도쿄에 집중돼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집중돼 있다면 거꾸로 지방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것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토로했다. 사실 《미소녀의 미술사》 전은 도쿄에서도 전시회를 열 수 있는지 여러 차례 타진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토리메가 연구소는 “전시회를 보고 싶으면 세 미술관 중 어디든 가면 된다.”고 거절했다.
시즈오카현의 경우 도쿄에서 그리 멀지 않지만 아오모리현과 시마네현은 도쿄에서 상당히 먼 오지로 인식되는 편이다. 그래서 이 전시회의 성공은 ‘지역’을 화두로 삼고 있는 현재 일본 문화정책 분야에서 연구 대상으로까지 떠오르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02년 ‘문화예술 진흥에 관한 기본적인 방침’을 새롭게 제정했는데, 기본 이념의 하나로 각 지역의 특색 있는 문화예술의 발전을 꼽고 있다. 주민들이 지역에서 문화예술을 가깝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지역 활성화에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이를 위해 일본 정부는 수도권 중심의 기존 문화예술 지원금은 깎고 있지만 지방에는 반대로 늘려주고 있다.
지자체 역시 지역의 문화예술 자원을 살려 주민의 창조성을 기르고 새로운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한 전략을 짜느라 분주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인 ‘문화예술에 의한 마을 만들기(마치 즈쿠리)’다. 예를 들어 예전부터 내려오는 제례행사(마츠리 등), 전통예능을 종합적으로 보존하고 활용하는 한편 전승자의 양성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또한 노후한 공장이나 발전소, 폐교, 창고 등 기능이 다해 버려진 공간을 예술 창작공간으로 바꾸는 것은 물론 지역 사회와의의 적극적인 네트워킹을 통해 새로운 커뮤니티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막상 시민 생활의 향상은 물론 경제적 이익까지 거둬들인 사례는 의외로 많지 않다. 지자체나 지역 단체들만으로는 힘에 부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리메가 연구소가 세 미술관에서 공동 기획으로 전시회를 연 것은 서로 다른 지자체와 지역 문화예술 시설들 사이에 협력과 역할 분배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새로운 사례를 보여준다. 무엇이든 혼자 하기보다는 여럿이 힘을 모을수록 위력적인 법이다.


[기사입력 : 2015.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