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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통신

[미국] BAM이 보여준 양면,
다행스러운 공존과 생존의 과제

임홍주 (미국 통신원)
  • BAM(Brooklyn Academy of Music) 공연장
    BAM(Brooklyn Academy of Music) 공연장


뉴욕에서 연극을 즐기는 관객들은 ‘Brooklyn Academy of Music’(BAM)이라는 공연장을 익히 잘 알고 있다. 무언가 전통적이지 않은, 새로운 방식의 공연을 보고 싶어 하는 관객들은 이곳을 찾는다. BAM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 공연장은, 세계 공연예술의 중심이라는 뉴욕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그리고 동시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실 오프 브로드웨이가 동시대적이거나 전향적인 성격의 공연에 매진하는 노력을 게을리했을 때 더더욱 급진적인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가 태동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졌다. 그러나 오늘날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의 공연들, 더 구체적으로 말해 실험극들이 예전과 같은 활력을 보이지 못하면서 사실상 오프와 오프 오프라는 지역적이면서 개념적인 두 경향의 경계는 희미해졌다. 한때는 연극의 개념마저 뒤흔들어 놓았던 실험극들은 이제 그 메카라고 할 수 있는 뉴욕에서 예전만큼 왕성하지 못하다.

뉴욕의 실험극 현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최근까지 뉴욕의 최신 공연들을 둘러본 필자의 스승과 나눈 대화를 공개하려 한다. 실험극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 뉴욕에서 공부하며 현장을 직접 경험했던 연출가요 교육자인 스승은 실험극의 쇠퇴를 시대의 변화에 따른 현상으로 보며, 이 시대에 걸맞은 실험극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일이 연극인들의 과제가 되었다고 말한다. 실험극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공연 중인 어느 연극에 대해 ‘연극에 호기심이 있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관광 상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날카롭게 비평하며 한 이야기다. 오늘날 실험극의 단면을 보여주는 말이다.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의 고요함은 BAM의 의미와 의의를 더욱 부각시키게 된 느낌이다. 흥행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해 파격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브로드웨이 연극에 익숙한 많은 관객은 여전히 무엇인가 다른 경향과 형태의 연극을 찾고 있고, BAM은 그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연장이 된 것이다. BAM은 1861년 설립됐으며, 화제로 전소된 후 지금의 라파옛(Lafayette) 애비뉴로1908년에 이전했다. 155년의 역사 동안 상당한 슬럼화가 진행된 브루클린에 여전히 세 개의 공연장과 전시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로버트 윌슨, 피터 브룩, 필립 그라스 등 이곳에서 공연했던 예술가들의 이름만으로도 BAM이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공연들과 역사를 함께 해왔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지금도 새로운 경향의 공연 예술가들이 일 년에 한 번씩 넥스트 웨이브 페스티벌(Next Wave Festival)을 이곳에서 열기도 한다. ‘실험’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BAM에 연극을 보러 가는 관객들은 아예 전통적인 방식이나 사실적인 무대는 기대하지 않는다. BAM은 역사적으로나 동시대적으로나 실험을 위한 공연장이다.
맨해튼의 중심가에 있는 브로드웨이에 비해 후미진 브루클린에 위치한 공연장 BAM이 브로드웨이와 경쟁 관계에 있지 않다는 점은 다행으로 여겨진다. 브로드웨이와 BAM의 관객들은 사실 뚜렷이 양분되지 않는다. 수요를 공유하는 셈이다. 관객들의 취향과 기호에 따라 공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 <세상의 영광>(The Glory of the World)
    〈세상의 영광〉(The Glory of the World)


얼마 전 막을 내린 〈세상의 영광〉(The Glory of the World)은 BAM 다운 새로움과 평범하지 않은 방식의 공연이었다. 찰스 미(Charles Mee)가 대본을 쓰고 레스 워터스(Les Waters)가 연출해 루이지빌 배우 극단(Actor’s Theatre in Louisville)이 공연했다. 찰스 미는 막스 에른스트 등에게서 영향받은 콜라주 형식의 극작으로 알려진 작가다. 이 작품 역시 예외 없이 그의 방식대로였다. 콜라주식 구성 자체는 전통적 희곡의 극작법으로 볼 때 여전히 탈 전통적이고 실험적이지만 찰스 미라는 작가를 아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토마스 머튼
    토마스 머튼

〈세상의 영광〉은 17명의 등장인물이 가톨릭의 수도사이며, 여러 편의 명저들(대표작 칠층산)을 낸 작가이기도 한 토마스 머튼의 100회 생일을 기념하는 내용이다. 토머스 머튼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연극 내용이 그의 생일축하 파티라는 사실을 알고 당혹스러울지 모르나, 작가인 찰스 미와 연출가 레스 워터스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관객들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을 듯싶다. 이들에게 애초부터 역사 속의 위인이나 고전 명작 등에 대한 존중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작품이 탄생한 배경은 우스울 만큼 단순하다. 그리고 아마도 이 뒷얘기가 이 작품, 〈세상의 영광〉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 레스 워터스(가운데), 찰스 미(우)
    레스 워터스(가운데), 찰스 미(우)

연출가 레스 워터스가 이끄는 루이지빌 배우 극단은 토머스 머튼이 살던 곳 근처에 있었고, 매일 아침 출근길에 레스 워터스는 ‘토머스 머튼, 이곳에서 영적 계시를 받다’라고 쓰인 기념비를 보게 되었단다. 궁금증이 생겨 그에 대한 책을 읽게 된 레스 워터스는 작가인 찰스 미에게 연락해 토머스 머튼(이미 작고한)의 백 번째 생일을 기념해 뭔가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찰스 미는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고 가족 중에는 성직자와 수도자도 있었다고 한다. 미국의 오랜 가톨릭 가정들이 그러하듯 토머스 머튼의 책들은 늘 그의 집 서재에 꽂혀있었다고 한다.
레스 워터스의 제안을 들은 작가 찰스 미는 이렇게 대답했단다. ‘글쎄요. 난 더 이상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서 머튼에 대해 뭔가 좋은 말을 쓰진 못할 텐데요. 어쩌면 내가 하는 일이 루이지빌에서 당신을 쫓겨나게 할지도 모를 겁니다.’ 이에 대해 레스 워터스는 ‘상관없다’고 대답했단다.



이 배경 자체가 이미 〈세상의 영광〉이 토머스 머튼을 기리기거나 칭송하려는 의도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어느 평론가의 표현대로 이 작품에서 토머스 머튼에 대해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심지어 그 내용이 토머스 머튼의 생일 파티인지 동성애자 파티 기획자의 생일 파티인지 모르겠다고 한 평론가도 있다.
공연의 시작은 기나긴 침묵으로 시작한다. 연출가인 레스 워터스가 무대 쪽을 향해 놓인 책상에 관객들을 등지고 앉아있다. 15분 가까이 되는 이 침묵 동안 레스 워터스(또는 남자라 명명된 등장인물)의 사색이 프로젝터를 통해 양쪽 벽에 자막으로 영사된다. 긴 침묵이 끝나고 왁자지껄한 소음과 함께 17명의 남자가 무대로 쏟아져 나와 머튼의 백 번째 생일 파티를 시작한다. 건배를 하며 제각각 토머스 머튼의 업적을 칭송한다.
머튼은 신비주의자로, 위대한 불교신자로, 운동가로, 사회주의자로, 그리고 가톨릭 신자로 각 등장인물에 의해 간단하게 정의된다. 토머스 머튼에 대해 세상이 알고 있는 단편들은 마치 콜라주처럼 머튼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이 정의들은 그 자체로 극적인 기능을 하지 않는다. 단편적 이미지의 나열이 될 뿐이다. 콜라주처럼 말이다.


  • 공연사진

그리고는 매트리스를 두 개 겹쳐 놓고 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해 남자들 간의 키스가 관객들의 바로 눈앞에서 긴 시간 동안 벌어지는가 하면 -필자를 포함해 동성애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은 매우 거북하게 심지어 혐오스럽게까지 느낄만한, 근육질의 흑인과 백인 두 남자배우가 객석 가장 가까운 무대에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진한 프렌치 키스를 나눈다.- 싱크로나이즈 수영과 물 위에서의 미끄럼타기 등이 어지럽게 벌어진다.
광기 어린 파티는 깨진 유리병에 머리를 비벼 얼굴에 피를 낭자하게 만드는 짓에서부터 배우들의 립싱킹, 느린 춤, 근육 자랑 등의 다양한 형태로 이어지고 이 과정에서 엉뚱하게 코뿔소까지 등장한다. 사내들 간의 싸움으로 번지는 파티는 칼부림이 난무하고 심지어는 전기톱까지 등장하는 아비규환으로 변한다. 분명 폭력적이지만 그 안에 장난기마저 엿보여 더 지독한 광기를 느끼게 한다. 이 걷잡을 수 없는 광란을 멈추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피자 배달부다. 광폭한 싸움질이 피자 배달부의 한마디에 잠잠해지고 방금 전까지 미친 듯이 싸움판을 벌이던 인물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하게 피자 한 판 씩을 받아든다.


공연은 처음 장면과 같은 침묵과 벽에 영사되는 남자의 사색으로 마무리된다. 무대를 향해 관객을 등지고 앉아 있던 남자가 마지막 장면에서는 객석을 향해 앉아 있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는 개인에 따라 노골적인 메타포로 또는 더 깊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연출가 자신의 말을 빌려보면, ‘이 침묵은 개인의 인내심에 따라 지루하게 길 수도 또는 충격적으로 짧을 수도 있다.’ 레스 워터스는 이 침묵의 장면이 관객들이 연극에서 기대하는 무엇인가에 부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편함을 줄 수도 있을 것이라며, 어느 날 공연이 끝나고 한 관객이 ‘이게 다야?’라고 외친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관객들은 아마도 이 두 침묵의 장면을 문학적 메타로로 이해하기 위해 애쓰게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연극에서 연출되는 각각의 장면들에 문학적 메타포를 적용하려는 해석 노력은 많은 실험극에서 그러하듯 헛수고가 되기 쉽다.

이 공연을 보는 관객들은 아마도 두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브로드웨이의 전통적인 공연보다는 실험적인 공연만을 주로 보는, 그래서 BAM을 자주 찾고 〈세상의 영광〉 같은 공연을 보는 데 익숙해져 있는 관객들이 첫 번째 유형이라면, 두 번째는 문학적 연극을 여전히 좋아해,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는 유진 오닐과 아서 밀러 작품의 문학적 깊이를 즐기다가 뭔가 다른 것, 새로운 공연이 보고 싶어지면 BAM을 찾는 관객들일 것이다. 이런 관객들은 실험극을 보면서도 상징과 문학적 메타포를 찾아내려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분명한 것은 두 유형의 관객들 모두 BAM이 환영할 관객들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 유형에 속하는 관객들은 공연 문화에 대한 상당히 유연하고 관대한 기호를 가진 사람들이다.

여담을 좀 보탤까 한다. 사실 이 공연을 보고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어, 한국에서 연극 교육자로 또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후배에게 영상과 자료를 보내 의견을 물었다. 한마디로 ‘재미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곧이어 ‘코뿔소는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나름 심각하고 거창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이 평론가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전혀 심각하지도 거창하지도 않았다.
‘이오네스코 같네요.’ 〈대머리 여가수〉를 쓴 그 유명한 부조리극 작가 이오네스코라는 것이다. 황급히 자료를 찾아보니 역시 그 후배의 직관은 정확했다. 토머스 머튼이 이오네스코와 그의 작품 〈코뿔소〉에 대한 에세이를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코뿔소가 갖는 문학적 상징이나 메타포에 대해 나름 심각한 질문을 던진 나는 무안함에 ‘후배지만 존경한다’는 감사 인사를 전하고 서둘러 대화를 마쳤다. 분명 그 후배는 BAM의 실험극도 브로드웨이의 전통적인 연극도 모두 감상할 줄 아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유형 모두에 해당하는 관객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오간 이 대화에서 필자는 여전히 두 번째 유형 관객들의 습성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고 말이다.

연극이 감동이든 재미든 그 감상 가치를 관객들에게 제공하기 위한 수단이 반드시 문학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문학이 아니라면 무엇인가는 있어야 한다. 어쩌면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에 비해 더 강렬해야 할지도 모른다. 연극은 문학에 기반을 두기 전에 이미 공연이었다. 텍스트 이전에 행위였다. 그러나 문학적 감상 가치가 연극을 보는 큰 이유로 관객들에게 자리하게 되고, 싫으나 좋으나 그것이 오랜 세월 연극의 전통이 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문학적이지 않으려면 그것을 대신 하고도 남을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기존의 질서와 가치관을 바꾸려는 것이 실험극과 BAM이 하려는 일 아닌가.
분명 새로웠다. 전통과는 구분되는 무엇이 있음은 뚜렷이 보였다. 다만 충분히 강렬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보류하고 싶어지는 공연이었다. 일렬로 서거나 안락의자에 앉아 토머스 머튼과 종교적 가치에 대해 한마디씩을 던지는 17명의 남자들, 논리적이거나 서로 간의 연관성 없이 배열된 파티의 일면들, 동성애자들의 애정 표현, 싱크로나이즈 수영, 별다른 동기 없이 근육을 자랑하는 남자들, 립싱크 음악, 코뿔소의 등장과 광기 어린 폭력 그리고 이 조각들을 떠받치는 시작과 끝의 침묵…. 이 공연이 과연 전통적인 연극에서 기대할 수 없는 ‘새롭고 다른 그 무엇’을 관객들에게 충분히 선사했는지는 의문으로 남았다.
지금은 다행히 유연하고 관대한 기호를 가진 관객들을 공유하고 있지만, 마냥 안주할 수 있을 것 같지만은 않아 보였다. 다른 것, 새로운 것으로 브로드웨이와 공존하고 있지만 생존을 위한 모색도 필요해 보였다.

BAM이 〈세상의 영광〉을 통해 보여준 양면이다.


아르코 로고

[기사입력 : 2016.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