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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통신

[일본] 히라타 오리자의 로봇 연극

장지영 (국민일보 기자, 공연 칼럼니스트)
  • 연극 <사요나라> ©南部辰雄
    연극 〈사요나라〉 ©南部辰雄
  • 영화 <사요나라>
    영화 〈사요나라〉

지난겨울 일본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영화를 꼽으라면 단연 후카다 코지 감독의 〈사요나라(일본 작별인사)〉다. 지난해 11월 하순 개봉해 5월 중순까지 일본 전역에서 차례차례 개봉되고 있는 이 영화는 방사능에 오염된 가까운 미래의 일본에서 피난 우선순위에서 밀린 외국인 타냐와 병약한 그녀를 어릴 때부터 간호해 온 안드로이드(인간과 똑같이 생긴 로봇) 레오나의 이야기를 그렸다. 사람들이 피난을 모두 떠난 뒤 레오나는 죽어가는 타냐의 옆을 끝까지 지킨다. 죽어가는 인간과 죽음을 모르는 로봇은 묘한 대조를 이루며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로봇 여배우가 주역으로 출연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일본은 물론 전 세계 영화제의 잇단 초청을 받고 있다.
현재까지 영화에 로봇이 출연한 사례는 적지 않지만 대부분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하거나 배우가 분장을 한 것이었다. 〈사요나라〉에 나온 안드로이드는 세계적인 로봇 전문가인 일본 오사카대학의 이시구로 히로시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이 2010년 개발한 것이다.
‘제미노이드 F’라는 이름의 이 안드로이드는 미모의 20대 여성을 모델로 했으며, 65가지의 표정 연기가 가능하다. 입을 움직여 말을 하거나 노래도 부를 수 있는데, 멀리서 보면 사람과 거의 구별이 안 된다. 다만 아직 걸을 수는 없어서 영화에선 휠체어를 타고 등장했다. 그리고 컴퓨터를 통한 원격조종을 받아 연기를 펼쳤다.
사실 제미노이드 F는 이미 연극에서 연기 실력을 쌓은 바 있다. 2010년 영화의 원작이자 일본의 유명 극작가 겸 연출가 히라타 오리자가 쓰고 연출한 동명 연극에 처음 출연했다. 연극 〈사요나라〉는 2013년 내한 공연을 가지기도 했는데, 당시 국내 연극 팬들은 물론 로봇 과학자들의 높은 관심을 끌었다. 제미노이드 F는 이후 히라타의 로봇 연극 시리즈에서 단골로 주역을 맡았다.
최근 국내에서 ‘예술과 기술의 융복합’ 붐이 불고 있지만, 아직 완성도 높은 공연 콘텐츠를 만나기는 어렵다. 인간과 로봇의 경계를 묻는 히라타의 로봇 연극 시리즈는 로봇이 일반화될 미래 사회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l 로봇 연극 프로젝트의 시작

20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로봇이 등장하는 무대는 일방적인 설치 퍼포먼스였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점차 인간과 쌍방향으로 앙상블을 이루는 공연을 지향하게 된다. 2001년 영국 작가 겸 연출가 수잔 브로드허스가 인공지능 아바타인 예레미야를 내세운 〈Blue Bloodshot Flowers〉 공연은 로봇 연극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 예레미야는 로봇이 아니라 2차원 그래픽이지만 실제 배우나 관객의 반응에 따라 스스로 기쁨•슬픔•화남•놀람 등의 표정을 보여줬다.
2008년부터 일본에서 히라타와 인공지능 로봇 권위자인 이시구로 히로시가 공동으로 시작해 지금도 업그레이드시키고 있는 로봇 연극 프로젝트는 로봇이 드라마가 있는 연극의 배우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로봇 퍼포먼스와 완전히 구별된다.
이 로봇 연극 프로젝트는 오사카 대학에서 예술과 과학기술의 융합으로 탄생됐다. 일본은 세계에서 수위를 다툴 정도로 로봇과학이 발달된 곳이며 오사카 대학은 그중에서도 거점으로 꼽힌다. 특히 이시구로는 인간과 유사한 로봇을 만드는 것에 전력을 쏟아왔다.
오사카시는 차세대 로봇 산업의 일환으로 2007년 이시구로에게 로봇을 이용한 관광 콘텐츠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로봇 연극을 만들어 아직까지 로봇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일반인에게 로봇이 있는 생활을 간접 체험하게 해주자는 시도였다. ‘엔터테인먼트형 실험’으로서 의미가 있는 데다 로봇이 일반화된 미래사회를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이시구로 역시 동의했다.
이시구로는 인간과 로봇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5분짜리 연극을 만들었다. 하지만 기술자인 이시구로가 연극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고, 같은 대학 커뮤니케이션 담당 교수인 히라타 오리자가 대본과 연출을 의뢰받게 됐다. 히라타는 그동안 예술가로서 아무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것에 흥미를 느껴 의기투합했다.
히라타는 우선 인간과 로봇이 나란히 주인공으로 나오는 25분짜리 대본 〈일하는 나〉를 썼다.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인간 부부와 2대의 로봇이 사는 가정의 이야기를 그렸다. 극 중에서 모모코라는 이름의 로봇은 요리 등 집안일을 잘하기 때문에 부부에게 없어서 안 되는 존재다. 반면 다케오라는 이름의 로봇은 일할 의욕을 잃어버린 상태로 일꾼 로봇인 자신의 존재의의를 고민한다. 그런데 부부 역시 문제가 있어서 남편이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내는 안달을 한다. 이들 인간과 로봇, 로봇과 로봇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이 작품의 테마다.
2008년 초연된 이 작품에 등장하는 2대의 로봇은 2005년 출시한 휴머노이드 형(인간과 비슷한 형태) 로봇 ‘와카마루’다. 신장 1m인 와카마루는 다리 대신 몸통 아래에 달린 바퀴를 이용해 시속 1km의 속력으로 스스로 이동한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1만 개의 기본 단어를 구사하며 짧은 문장으로 대화도 가능하다. 특히 말하는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를 인식할 수 있어서 최대 100명까지 기억한다.
〈일하는 나〉는 원래 와카마루를 음성인식으로 움직이려고 했으나 감탄사 등 사람의 말을 잘못 인식할 우려 때문에 무대 옆에서 오퍼레이터가 컴퓨터 원격조종으로 움직였다. 히라타는 대본에 로봇의 이동을 지시하는 지문을 넣은 것은 물론이고 초 단위로 계산해 대사를 하게 하는 등 인간과 로봇의 커뮤니케이션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애썼다.
이 작품은 초연 직후 일본 내에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대개 일반인은 애니메이션이나 SF영화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한 로봇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이 연극을 통해 실제 로봇과 접하면서 적지 않은 위화감을 느꼈던 것이다. 비록 오사카시가 처음에 원했던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되지는 못했지만, 인간과 로봇의 공존 및 정체성을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일본에서 지난해 가정용 휴머노이드 로봇 ‘페퍼’가 만들어져 보급되고 있는 만큼 히라타와 이시구로가 연극에서 던지는 문제는 이제 미래가 아닌 현재형이 되었다.
〈일하는 나〉의 성과에 고무된 히라타와 이시구로는 와카마루를 이용한 두 번째 연극 〈숲의 심연〉을 공연했다. 2010년 일본 아이치 트리엔날레의 개막작인 〈숲의 심연〉은 한국에서도 공연된 히라타의 동명 희곡을 로봇 연극 버전으로 선보인 것이다. 유인원연구센터를 배경으로 생명공학과 그에 따른 생명윤리를 주제로 다룬 이 작품에는 2대의 와카마루가 연구원으로 등장한다. 유인원의 실험을 놓고 인간과 로봇이 생명 윤리를 토론하는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 언뜻 인간과 로봇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오게 한다.

l 안드로이드 연극의 등장과 로봇 연극의 진화

〈일하는 나〉와 〈숲의 심연〉을 통해 로봇 연극이라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히라타와 이시구로는 또다시 도전에 나섰다. 바로 인간과 똑같은 외모를 가진 로봇, 즉 안드로이드를 배우로 세운 것이다. 2010년 아이치현 트리엔날레에서 〈숲의 심연〉과 함께 공연된 〈사요나라〉는 죽음을 눈앞에 둔 여인이 안드로이드가 읽어주는 시를 들으며 생의 마지막을 맞이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에 출연하는 안드로이드가 바로 제미노이드 F다. 이시구로는 2000년대 초반부터 실리콘을 이용한 말랑말랑한 외피에 센서와 모터를 이용해 상체에만 수십여 가지의 동작이 가능한 안드로이드들을 만들었다. 이 안드로이드들은 눈꺼풀을 깜빡이거나 눈동자를 움직이는가 하면 호흡에 따라 얼굴이나 어깨가 가볍게 움직이는 등 보다 자연스러운 표정과 태도를 가지고 있다. 특히 2006년 이시구로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안드로이드 ‘제미노이드 Hi-1'를 선보이면서 큰 발전을 했다.
하지만 기술적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탓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어서 제미노이드 F는 공연 내내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분 정도의 단편인 〈사요나라〉는 움직임이 적은 히라타 특유의 대화체 연극이라 이질감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연극은 인간이 연기하는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부순 이 작품은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받았다. 특히 2011년 멀티미디어 아트 분야에서 권위 있는 축제인 오스트리아의 아르스 엘렉트로니카에서 수상한 뒤 세계 각국 페스티벌에 초청받고 있다.
히라타와 이시구로는 2012년엔 와카마루를 개량한 ‘로보비 R3'와 제미노이드 F가 동시에 출연하는 연극 〈세 자매〉를 내놓았다. 체홉의 동명 희곡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이 작품에서 죽은 여동생을 닮은 안드로이드는 인간 대우를 받는 반면 일반 로봇은 집안일을 하는 상황이 묘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죽은 여동생이 사실은 은둔형 외톨이여서 자신을 대신하는 안드로이드를 내세운 것이 밝혀지는 장면에선 가족의 일원까지 안드로이드가 대행하는 차가운 미래사회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게 만든다.
이어 최근작인 2014년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을 각색한 동명 연극의 경우 ‘리플리 S1’이라는 새로운 안드로이드가 나온다. 이 로봇은 인간처럼 생긴 전작의 안드로이드들과 달리 기계 부분이 드러난 해골 같다. 다만 눈의 움직임이나 손과 발의 사용은 매우 정교한 것이 특징이다. 어느 날 침대에서 일어난 주인공이 원작의 벌레 대신 로봇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그렸다. 가족들은 주인공이 로봇인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지만 가족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은 로봇이 된 주인공이다. 이 작품은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경계, 그리고 안드로이드에 대한 인간의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히라타가 다음엔 어떤 로봇 연극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로봇 강국답게 로봇 연극 분야에 새로운 장을 연 일본과 비교해 한국은 어떨까. 한국 역시 로봇 분야에서 상당한 진전을 이뤄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은 2006년 여러 표정이 가능한 안드로이드 ‘에버1’을 발표했다. 에버1을 개량한 ‘에버3’는 2009년 국립극장에서 열린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엄마와 함께 하는 국악보따리〉 공연에서 판소리를 했다. 에버3의 목소리와 동작은 국립창극단 주역 배우였던 박애리의 소리와 움직임을 사전에 프로그래밍한 것으로 원격조종으로 움직였다. 당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에버3는 걷지도 못한 데다 표정 연기도 어색한 수준이었다. 이후 에버3는 같은 해 연극 〈로봇공주와 일곱난장이〉의 주인공을 맡으며 안드로이드로는 일본보다 먼저 세계 최초로 상업극에 출연하는 기록을 남겼다.
그런데, 에버3의 깜짝 활동을 제외하면 한국에서의 로봇 공연은 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시연에 그치고 있다. 에버3가 출연한 〈로봇공주와 일곱난장이〉 역시 예술과 과학 사이의 통섭을 생각하게 만들었다기보다는 아이들을 위한 볼거리에 머물렀다. 한국에서도 로봇에 대해 심도 있는 토론이 가능한 작품을 보고 싶지만 아직은 예술과 과학 사이의 거리가 먼 것 같다.


  • 연극 <숲의 심연> ©南部辰雄
    연극 〈숲의 심연〉 ©南部辰雄
  • 히라타 오리자 ©T. Aoki
    히라타 오리자 ©T. Aoki
  • 이시구로 히로시 박사와 자신을 닮은 안드로이드 제미노이드 Hi-1 ©ATR石黑浩特別硏究所
    이시구로 히로시 박사와 자신을 닮은 안드로이드
    제미노이드 Hi-1 ©ATR石黑浩特別硏究所


아르코 로고

[기사입력 : 2016.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