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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문화융성’ 담론 유감:
우리사회가 문화적으로 융성하지 않다고?

김정수 (한양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 2015 8월 ‘문화융성의 방향과 추진계획’ 발표 ©문화체육관광부
    2015 8월 ‘문화융성의 방향과 추진계획’ 발표 ©문화체육관광부


요즘 우리나라 문화정책의 키워드는 단연 ‘문화융성’이다. 박근혜 정부는 문화융성을 4대 국정기조의 하나로 내세우며 임기 내 문화재정 2% 달성을 약속하였다.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이제 정부가 문화의 막대한 중요성과 가치를 인정했다며, 적어도 총론 차원에서는, 이를 반기고 적극 지지하였다. 정부가 문화융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배경에는 “현재 우리 사회의 문화는 그다지 융성하지 못하다”는 판단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국가가 정책적으로 개입하여 융성하지 못한 문화를 융성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제에 대하여 “정말 그러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은 거의 없는 듯하다. 과연 우리나라의 문화는 정부의 인위적인 부양책을 필요로 할 정도로 그렇게 시들거리고 있는 것일까? 혹시 우리나라는 이미 충분히 문화가 융성한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의 문화가 그다지 융성하지 못하다는 우려는 혹시 착각이나 오진이 아닐까?
어떤 사안에 대해 반대 의견 하나 없이 모두가 동의한다는 것은 그것이 자명한 진리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도 다른 측면을 보지 못할 정도로 모두의 시각이 철저하게 편향되었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현명한 정책결정을 위해서는 모두가 찬성할 때 고의적으로 반대하는 Devil’s Advocate가 필요하다고 한다. 만약 문화융성 정책의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면 문화재정 2%를 비롯하여 문화융성 달성을 위한 각종 정책들은 무의미해질 뿐만 아니라 나아가 국가 전체적으로는 공적자원의 엄청난 낭비가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일종의 Devil’s Advocate 입장에서 문화융성 정책의 전제에 대해 한번 시비를 걸어볼까 한다.

우선 문화융성 정책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은 그 지향하는 바, 소위 정책목표가 대단히 불명확하고 모호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문화융성의 정확한 뜻은 무엇일까? 문화융성위원회는 출범 당시 “문화적 가치가 사회 전반에 확산되어 정치·경제 등 모든 분야의 기본원리로 작동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를 이루며 국민 개개인의 행복수준을 높이는 것”이라 문화융성을 정의했었다. 하지만 현재 문화융성위원회 홈페이지(http://www.pcce.go.kr)의 소개 자료에는 문화를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생활양식, 관습, 사고방식 및 가치관의 총체”라고 정의하면서 “이러한 문화가 융성하는 것이 바로 문화융성”이라고 단순하게 기술하고 있다. 문화융성위원회에서 원용하는 문화의 개념은 인류학적 개념으로서 대단히 넓은 의미의 개념정의이다. 더구나 ‘융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다. 따라서 문화융성위원회의 개념정의대로라면 현재 우리나라의 문화가 융성하지 못하다고 단정 지을만한 증거가 딱히 없다.
물론 문화융성위원회나 정부에서 실제로 추진하는 정책들을 보면 문화의 개념을 그렇게 넓은 의미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문화융성위원회에서 제시한 문화의 네 가지 가치(행복을 만드는 문화, 경제를 살리는 문화, 마음을 여는 문화, 국격을 높이는 문화)에 대한 설명들을 읽어보면 문화를 인류학적 개념보다는 훨씬 좁게 이해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한편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2013년 대통령보고 자료를 통해 문화의 융성을 “인문, 예술, 콘텐츠, 체육, 관광 등 문화 분야의 역량이 전반적으로 향상되고, 예술가의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며, 시민의 문화향유권과 사회 내의 문화다양성이 확대되는 것”이라고 범위를 좁혀 정의하였다. 여기서 “인문, 예술, 콘텐츠, 체육, 관광”은 사실상 문화체육관광부의 부서별 업무영역을 나열한 것이다. 결국 정부가 생각하는 문화융성이란 예술이 핵심을 이루고 관련 영역들이 주변을 형성하는 소위 ‘문화예술’의 창작(생산)과 향유(소비) 활동이 왕성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융성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먼저 예술 분야의 공급과 소비 실태에 관해 살펴보자. 우선 문화예술인 실태조사에 의하면 예술가의 수는 1990년 4만 4,728명에서 2010년에는 무려 10배인 44만 5,670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 총 인구 수가 약 12% 증가한 것에 비하면 실로 엄청난 증가가 아닐 수 없다. 문화예술사업체 수는 2009년 기준 전국 총 10만 1,824개소였고, 2013년 기준으로 예술공연단체는 총 2,108개, 공연시설은 총 944개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연구에 의하면 특히 공연예술의 경우 1990년대 들어 가속화된 인프라의 확대는 유례가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우리나라 국민들의 문화향수 실태조사에 의하면 예술행사관람률은 2000년 54.8%에서 계속 증가하여 2003년 62.4%, 2008년 67.3%, 그리고 2014년에는 71.3%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향후 1년 이내 예술행사 관람 의향도 85.4%나 되었다. 예술행사에 직접 참여할 의향도 2010년 3.7%에서 2014년에는 8.1%로 늘어났다.
이러한 통계수치들은 우리나라 예술시장의 현황이 이렇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그러나 이 수치들 자체만 가지고 문화융성의 정도에 대한 판정이 자동적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상황이 과연 적정한지 아닌지에 대한 정책적 판단이 있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 예술의 생산과 소비는 어느 정도 수준일까? 최적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 저조한 수준일 수도 있고, 아주 적정한 균형 수준일 수도 있다. 또 어쩌면 이미 최적 수준을 넘어선 과잉 수준일 수도 있다. 서두에서도 강조했듯이 문화융성 정책이 의미 있는 정책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사회의 예술 생산·소비 활동이 그리 충분하지 못하다는 판단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누가 이 판단을 정확하게 내릴 수 있을까? 예술의 사회적 최적 수준을 예술가 혹은 문화부 관료가 판정하게 한다면 그들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과대평가하는 유아독존식 아집이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 공급자는 항상 자신이 공급하는 상품·서비스의 가치와 필요성을 과장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예술 활동 및 향유의 적절한 수준이란 결국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정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은 곧 사회 문제에 관한 최종 결정권은 국민에게 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현대 한국 사회에서 예술의 가장 적정한 생산·소비 수준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취향과 선택이 시장에서 반영되어 결정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특정 분야 몇몇 소수의 전문가(예술가 혹은 정부 관료)들이 국민 전체를 대신하여 예술의 최적 수준과 규모를 결정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된다. 국민 다수의 취향을 무시한 소수 전문가의 폭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문화는 과연 무엇이며 어떤 문화가 얼마만큼 보존·계승·발전되어야 하는 것인지를 소수의 예술가나 정부 관료가 정해서는 안 된다. 왕조국가나 전체주의가 아닌 다음에야 국민이 아닌 국가가 한 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정할 권리는 없다.

이제 시야를 더 넓혀서 예술뿐 아니라 주변의 관련 영역까지 포괄하는 ‘문화적 삶’에 대해 생각해보자. 오래전 문화정책의 초창기에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주로 순수예술을 강조하는 엘리트주의 혹은 소위 문화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culture) 관점에 입각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모든 문화예술 장르의 평등성이 강조되는 문화적 민주주의(Cultural democracy)가 문화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이다. 하지만 여전히 문화 전문가 및 관료들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엘리트주의적 사고방식이 편만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단적인 예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문화향수실태조사의 경우, “문화향수”라는 용어를 쓰고 있지만 그 내용을 보면 대부분이 ‘예술행사’에 치우쳐있다. 문화융성위원회에서 융성시키고자 하는 ‘문화’도 사실상 ‘예술’에 크게 경도되어 있다.
넓은 의미의 문화적 삶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문화융성 수준에 대해 상당히 다른 판정도 나올 것 같다. 굳이 고상한 ‘예술’이라는 멍에에 얽매이지 말고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해 한번 자유롭게 생각해보자. 불금에 친한 친구들과 만나 팝송이 흐르는 호프집에서 편하게 디자인된 의자에 앉아 술 마시고 웃고 떠들다가 2차로 노래방에 가서 마음껏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는 것은 그 나름 멋진 문화적 삶이 아닐까? 주말 오후에 소파에 편하게 누워 치맥과 함께 TV로 ‘별에서 온 그대’를 보며 가슴이 설레거나 혹은 ‘무한도전’을 보면서 즐겁게 박장대소하는 것은 과연 문화적 삶이 아닌 것일까? 출퇴근길에 스마트폰에 이어폰을 꽂고 홀로 음악감상을 하거나 미드 동영상을 보는 것은 문화생활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일까? 멋진 레스토랑에서 예쁘게 장식된 음식이 나오면 셀카로 인증샷을 찍어 SNS에 올리는 것은 또 어떤가? 여성이건 남성이건 멋지게 화장하고 패션에 신경 쓰는 것은 일상의 문화화가 아닐까?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의 배경화면으로 사용할 멋진 사진들을 검색하는 것은 미술 전람회를 찾는 것만큼이나 미적인 활동이 아닐까? 대부분의 문화예술전문가들에게는 이런 생각이 발칙한 이단적 사고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이미 문화적으로 충분히 융성한 것이 아닐까? 단지 엘리트주의적 시각에서 보니 부족하게 느끼는 것이 아닐까? 아니 어쩌면 ‘벌거벗은 임금님’을 바라보는 수많은 구경꾼들처럼 차마 이런 일상생활도 멋진 문화적 삶이라고 외칠 용기가 없는 것은 아닐까? 사실은 이런 사소한 일상들이 우리를 진짜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만약 우리나라가 이미 문화적으로 충분히 융성한 상황이라면 정부의 문화융성 정책은 그 존재근거 자체가 없어지게 되는 셈이다. 물론 국가가 문화예술의 보호와 진흥을 위해 노력할 책무가 있다는 원론적 주장 자체는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국가 개입은 결코 요술방망이가 아니며 공짜 점심도 아니다. 국가의 정책개입으로 인해 얻어지는 긍정적 혜택도 있지만 그에 따르는 각종 비용과 부작용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국가 재정은 제한되어 있으므로 문화에 대한 정부지원이 많아지면 정부의 손길이 필요한 또 다른 영역에 대한 지원은 필연적으로 줄어들게 된다. 또한 국가가 개입하는 공공부문이 비대해지는 만큼 민간부문의 자율적 영역은 그만큼 축소된다. 이는 국민의 호주머니에서 빼가는 세금이 그만큼 늘어남을 뜻하며 아울러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폭이 그만큼 줄어듦을 뜻한다. 우리가 전체주의 사회를 이상향으로 추구하지 않는 다음에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최대한 존중해주어야 한다. 국가가 국민들로부터 돈을 거두어서 국가가 국민들에게 유익한 것이라 판단한 것을 제공해주는 방식은 가급적 최소화해야 한다. 그 대신 국민들이 자기가 번 돈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소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민들에게 이것이 좋고 저것은 나쁘다고, 이것은 더 소비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고 시시콜콜 알려주는 국가는 ‘친절한 국가’가 아니라 끔찍한 잔소리꾼이고 독재자에 불과하다. 다른 정책도 아닌 문화정책이라면 그 모든 과정이 진정 ‘문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김정수
김정수

고려대 법과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Yale University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고려대 공공행정학부에 재직하였으며 현재는 한양대 정책과학대학 행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문화정책학회 창립이사, 한국정책학회 편집위원장, 문화체육관광부 자체평가위원, 공공기관 경영평가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주요 관심분야는 문화정책과 정책이론이다. 주요 저서로는 『문화행정론:이론적 기반과 정책적 과제』(학술원 우수도서 선정), 『스크린쿼터의 추억:한국영화 의무상영제도 변천사』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스크린쿼터와 딴따라:대중문화에 대한 정부개입과 문화산업경쟁력에 관한 시론」, 「미녀와 야수:문화행정의 새로운 패러다임 모색」, 「불확실성, 결정오차, 그리고 제비뽑기의 역설:문예진흥기금 지원심의방식에 대한 역발상」, 「문화생산의 글로벌화에 따른 새로운 문화정책 패러다임의 모색:우리나라 영화산업의 사례를 중심으로」, 「(신)한류에서 배우는 문화정책의 교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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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5.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