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호보기
  • 구독신청
  • 구독자의견
  • 아르코발간자료
  • 인쇄
  • 맨위로 이동

예술과 사람

언어 너머의 행동, 그 행동 안의 언어
리사 페이와 제프 글래스만 듀오와의 대담

인터뷰어 : 유진규 (마임이스트) / 글 : 허영균 (작가)
  • 리사 페이, 제프 글래스만
    리사 페이, 제프 글래스만
  • 행동 악보(보표)
    행동 악보(보표)
  • 행동 악보(보표)



계절의 주인이 바뀌는 12월의 첫날. 늦장 부리며 좀처럼 비켜나지 않는 가을을 K.O 시키는 겨울바람과 함께 바람의 도시 시카고에서 두 명의 예술가가 왔다. 시카고와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마임 듀오인 리사 페이(Risa Fay)와 제프 글래스만(Jeff Glassman)은 행동을 분절하고 기록하는 ‘행동 악보’를 고안하여, 행동의 구조와 문법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한국 마임의 선구자이자 영원한 빅보이 마임이스트 유진규가 이들과의 대담을 진행했다. 세 사람의 움직임 탐험가(Movement explorer)들의 만남을 기록한다.


  • 대담하고 있는 리사 페이와 제프 글래스만, 유진규
    대담하고 있는 리사 페이와 제프 글래스만, 유진규

l 순간의 깊이(Depth of a momentⅡ)와 순간의 가능성

유진규(이하 유):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올해 D.FESTA에서 공연한 〈순간의 깊이(Depth of a momentⅡ)〉 잘 봤습니다.
리사 페이, 제프 글래스만(이하 리사, 제프): 영광입니다.

유    : 서울에 여러 번 다녀가신 걸로 아는데 도시에 대한 감상이 궁금하네요.
제 프: 저는 이번이 다섯 번째 방문이에요. 올 때마다 항상 서울이라는 도시의 깊이(Depth)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아주 작은 공간도 경제적으로 사용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리 사: 큰길에서 한 블록만 들어가도 전혀 다른 분위기의 좁은 골목이 등장해요.
유    : 대학로만 해도 그래요. 저는 골목길을 더 좋아해요.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의 소리, 실루엣 등을 어깨너머로 엿볼 수 있죠.
리 사: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 속에 진짜 삶(리얼 라이프!)이 있어요.


유    : 이번 작품이 이러한 일상적 환경 속의 사람의 모습을 잘 그려낸 것 같아요. 특히나 첫 장면이 기억에 남는데,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몸보다 큰 코트를 입은 사람이 등장했었죠. 몸에서 제일 중요한 머리조차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요. 그 자체가 굉장한 상징이라고 봤어요. 보통 사람인 우리가 갇혀있는 가눌 수 없는 상황, 환경에 대해서 대단히 명확히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리 사: 오프닝 장면은 〈Hung〉이라는 작품의 일부에요. 미국에서 흔히 쓰는 표현 중에 ‘Hung up’이라는 말이 있는데 뭘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상태를 나타내요.
유    : 이런 작품이 미국에서 탄생했다는 건 미국인들의 삶이 ‘Hung up’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걸까요?
리 사: 저는 그렇다고 생각해요. 사회 계층, 인종, 그룹마다 각각 다른 종류의 압박감을 느끼고 있을 거예요.
유    : 작품은 무엇보다 관객과의 공감이 중요하죠. 미국 관객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어떻게 공감했는지 궁금하네요.
리 사: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몸들을 향한 관객들의 반응을 통해서, 관객과 나 사이의 연대감을 느낄 수 있어요. 깜짝 놀라거나, 충격을 받아서 일시적으로 마비된 상태가 된 것을 보면 ‘아, 뭔가 전달되었겠구나’하고 생각하게 되죠.
제 프: 개별 작품들 하나 하나로는 우리가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우리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가능성과 가능성에 대한 깨달음인데 우리가 지속하고 있는 작업을 통해서 이를 전달하고 싶어요. 우리가 공연해온 작품들의 주된 가치인 ‘일상에서의 사소한 발견으로부터 비롯된 새로운 가능성’을 제대로 전달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l 몸짓의 세계와 언어라는 구조

유    : 저는 언어를 넘어서는 몸짓의 세계가 마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리 사: 마임뿐만 아니라 예술 자체가 그렇죠. 단어, 문장, 언어가 따라잡을 수 없는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 예술이니까요.
제 프: 언어는 마임에 비해 한정적이에요. 이론적으로만 보면, 언어는 최소 둘 이상의 사람 사이에서 발생할 때 성립되죠. 또 언어는 행동을 규정짓기 때문에 독립적일 수 없는 면도 있고요. 행동은 그렇지 않아요.
유    :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언어의 힘을 믿고, 언어만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또한 현실이죠.
리 사: 광고는 소비자들에게 ‘사야만 한다’고 ‘언어’로 주입하잖아요. 이런 방식은 사람들이 어떤 물건의 필요성을 쉽게 맹신하게 만들어요. 하지만 우리 직업은 예술가고, 예술로서 사람들을 설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마임을 통해서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사람들이 맹신하는 일은 없겠지만,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제 프: 사람들은 머리를 통해 정보를 인식하고, 인식된 정보에 따라 행동을 규제해요. 횡단보도를 걷는 것을 예로 들면, 바뀐 신호를 인식하고(인식), 머리가 내리는 걸어도 좋다는 명령을 받고서야(언어화), 우리는 걷기라는 행동을 하죠(행동). 현대인들은 알게 모르게 언어의 힘에 종속되어 살고 있어요. 이것이 우리가 하고 있는 마임의 영역이 좁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죠.
유    : 모순적이지만 마임의 영역이 좁아질수록 오히려 귀해진다고 생각해요, 저는.
제 프: 저도 항상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언어에는 말하기, 쓰기 그리고 문법처럼 조직과 구조가 있는데 행동이나 동작에도 언어에서의 문법 같은 단위가 있거든요.
리 사: (테이블 앞의 와인 잔에 손을 뻗으며)“나는/컵으로/손을/뻗는다.”이런 식으로요. 손이 컵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 역시 구조이자 단위에요.
제 프: 사람들은 ‘의도’를 가지고 행동을 취하게 되는데, 언어 역시도 발화되기 위해서는 의도가 필요해요. 저는 기본적으로 이 두 가지 과정의 논리가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리 사: 우리 작품 안에서는 행동이 선행하고 언어가 뒤따르죠. 실제와는 반대로, 행동이 언어를 조정하고 조율하게 하는 거예요. 저희는 행동이 언어를 통제하는 상황을 그리고 싶었어요. 역행하는 동작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순서를 바꾸는 등의 테크닉을 통해서요.

l 행동 악보 그리기

유    : 두 분 작업의 가장 큰 특징은 마임, 행동, 움직임을 악보화(무보화)하는 것이 아닐까 해요. 행동을 통해서 스코어를 만들어내고, 움직임을 표기하는 방식, 다시 말해 물리적인 기법으로 추상적인 행동을 기록하는 방식은 다른 마임 예술가들의 작업과 확실히 구분되는 점이기도 하고요. 그 기법으로 음악도 만든다고 들었는데 음악과 행동 악보의 상관관계가 무엇인지도 궁금하네요.
제 프: 작품마다 각기 다른 관계가 있어요. 악보를 필수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극장이라는 물리적 환경과 추상적 기법을 연관시키려고 해요. 꼭 연극이라는 표현 양식이 아니더라도 기하학적인 생각을 3D 환경에서 풀어내고자 하는데, 보는 이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유    : 전 세계에 행동 악보(보표)를 그리는 분들은 두 분뿐일 텐데, 두 분 중 누가 그리시나요?
리 사: 둘 다요. 우리한테는 익숙한 기호이기 때문에 생각날 때마다 각기 다른 양식의 악보(보표)를 그리죠.
유    : 워크숍에서도 행동 악보를 다루게 되겠네요?
리 사: 우리가 악보를 읽어주고 사람들이 가장 관심 있어 하는 악보를 보면서 몸을 움직이게 하려고 해요.
유    : 참가자들이 악보를 그리도록 할 생각인가요?
리 사: 거기까지는 시간이 충분할 것 같지 않지만 사람들이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더 많이 다루게 될 거예요.
유    :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귀한 말씀 고맙습니다.
리사, 제프: 무척 즐거웠습니다. 시간이 모자란 것이 아쉽네요.


  • 12월 2일에 진행된 마임워크숍
    12월 2일에 진행된 마임워크숍
  • 12월 2일에 진행된 마임워크숍

  • 12월 2일에 진행된 마임워크숍



[기사입력 : 2014.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