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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사람

박흥용, 그의 만화는 바람이 넘실거린다 

장상용 (중앙일보 기자)


  • 박흥용 작가
    박흥용 작가


이윽고 왕군 연장자(아가멤논) 큰 소리로 말했네.
 ‘순종치 않으므로 받는 이 불행이여! 
아, 내 사랑하는 딸을 죽여야만 하다니!   
제단 옆에서 딸을 죽여    
아비의 손을 그녀의 피로 물들이다니!      
이 고뇌 속에 나는 살아야 하는가.          
신성한 맹약을 깨뜨리고 
함대를 버리는 비겁한 짓을 어이하리.   
그들이 갈망하고 있는 것은 처녀의 피          
풍랑을 잠재우기 위함이니...!’      



그리스 비극시인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에서 아가멤논이 그리스군의 출정을 가로막는 광풍을 달래기 위해 딸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바치는 대목이다. 그리스 최고 영웅을 딸을 죽이는 비정한 부친으로 만든 것은 바람이다. 시종일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광풍은 긴장감을 불어넣으며 작품 전체를 지배해버린다. 

바람 중 〈아가멤논〉이나 〈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광풍, 폭풍만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다. 곡풍, 산풍, 연풍, 황사, 높새바람, 돌풍, 실바람, 남실바람, 산들바람, 건들바람, 흔들바람, 된바람, 노대바람, 갈마바람, 강쇠바람, 날파람 등 어떤 바람이든, 얼마든 나름의 매력으로 사방팔방 넘나들며 공간을 역동적으로 재구성한다.  

그런 면에서 박흥용은 ‘바람의 만화가’다. 다른 만화가들은 그리 친하지 않은 온갖 바람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풍백(風伯, 바람신)이라고 할까? 그의 만화를 넘기면 종이 사이에서 바람이 흘러나오는 듯하다. 아니, 독자는 순간만 방심하면 박흥용의 그림 컷 안에 빠져 주인공의 머리카락 사이로 흘러나간 그 바람을 얼굴 피부로 느끼는 체험을 한다. 박흥용을 지난 30여  년 동안 개성 있는 만화가로 지켜준 매력의 진원지는 바로 바람이다.

박흥용의 출세작인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1995년 만화잡지 ‘투엔티세븐’ 연재)에서 견자의 맹인 스승 황정학이 허리 높이까지 오는 풀숲 속에서 칼잡이와 칼을 겨누고 있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상대 칼잡이가 쓰러질 때까지 황정학은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가장 유명하고, 분위기 전체를 결정지은 이 장면은 풀숲과 두 사람을 쓸고 지나가는 바람 때문에 너무나 역동적이다. ‘솨와아아아’ 소리와 함께 풀을 한 방향으로 눕히며 몰고 가는 바람은 실바람이나 남실바람은 아니고, 흔들바람쯤 되는 듯하다.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풀이 누운 각도를 보면 지면 왼쪽 하단에서 오른쪽 상단으로 바람이 질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람이 지나간 오른쪽 상단 위쪽에선 뽑혀나간 풀 몇 가닥이 공중에 날리고 있다. 그런데 바람을 더 구체적인 대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맹인 칼잡이 황정학의 자세다. 황정학은 상대 칼잡이와 마주하고 있지 않는다. 상대 칼잡이는 바람을 등지고 있으니, 그와 맞선다면 황정학은 바람을 정면으로 맞아야 한다. 황정학은 칼을 뽑은 후 상대에게 오른쪽 팔을 노출한 채 바람이 지나가도록 길을 터주고 있거나 바람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하다. 단정했던 풀숲은 바람과 만나는 순간, 스스로 움직이며 두 칼잡이를 삼킬 듯한 위태로운 공간으로 변모한다. 

칼잡이는 칼바람을 달고 다닌다. 견자와 여행길을 떠난 황정학은 칼 소리만 듣고도 두 칼잡이의 자세를 정확히 설명한다. “한 손으로 칼을 잡은 사람이 주로 공격을 하겠구나. 칼이 바람을 가를 때 내는 소리가 날카로우면 한 손을 사용한다는 뜻이고, 또 방어보단 공격에 용이하기 때문에 기세를 잡았다는 뜻이다.” 견자 역시 칼잡이가 된 이상, 칼바람과 일체가 되어 간다.   

바람은 한이 가득한 칼잡이 견자에게 인생의 나침반 노릇을 하기도 하다. 기녀를 괴롭힌 형리 셋을 죽인 견자에게 수모를 피하게 된 기녀가 감사의 큰절을 올린다. 그 순간 젊음의 에너지를 분출하지 못하는 반항아에서 인생에 눈을 뜨는 무술가로 성장하는 견자의 독백이다.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이 눈을 시리게 해서 눈물이 난다. 이상하다. 다들 멀쩡한데 왜 내 눈에만 눈물일까. 아, 나도 저런 여자 얻어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바람은 어디서 불어 어디로 가는 걸까. 풀렁, 도포 자락 들추고는 조용하다.’    

사회 문제를 여러 방식으로 다룬 초기작들에선 거의 존재감이 없던 바람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살아나 절묘한 리듬감을 형성했다. 이와 함께 박흥용은 만화계에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지닌 작가가 됐다.    

바람은 공간, 인간의 오감(주로 청각, 시각, 촉각, 후각)과도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바람을 만들어내는 것은 특정한 공간이고, 그 바람이 인간의 특정한 감각을 자극하고 키운다. 따라서 공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바람이다. 

박흥용의 만화에서는 공간, 바람, 인간이 개별적으로 각각 주체성을 갖고 있다. 공간, 바람, 인간 중 어느 하나가 다른 대상을 압도하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바람 따라 여행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 특히 그의 만화에서 소리나 빛은 공간, 바람, 인간이 빚어내는 절묘한 하모니의 산물이다.  

박흥용은 이런 하모니 속에서 탄생하는 소리나 빛에 대한 실험을 즐기는 듯하다. 2008년 선보인 소리와 ‘착청’(청각에 나타난 착각)을 소재로 한 만화 〈쓰쓰돈돈쓰돈돈돈쓰돈돈쓰〉을 살펴보자. 시골 마을에서 장날 튀밥 장수 흉내를 내는 아이들은 바람 들어간 고무신을 밟아 동네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퍼엉' 소리 만들어내는 장난에 빠져든다. 화자의 내레이션이다.



  • 〈쓰쓰돈돈쓰돈돈돈쓰돈돈쓰〉
    〈쓰쓰돈돈쓰돈돈돈쓰돈돈쓰〉

‘신발을 밟아 터트린 소리가 
들판을 달리다가, 
어느 산에 부딪쳤는지,
메아리로 적적하게 
돌아옵니다. 
퍼엉, 퍼엉, 퍼엉... 
그런데 
그 소리가 왜 그리 허허롭습니까? 
하긴, 바람이라는 게 
그렇죠 뭐. 

공(空)하고 허(虛)한 
바람이 고무신 안에 숨어있다고 
우기면...’

'퍼엉' 소리는 산으로 둘러싸인 공간, 고무신으로 흘러든 바람, 장난기 넘치는 아이들이 만들어낸 정겨운 하모니다. 
이 만화에서 춤추는 여자가 공중에서 치마를 펄럭이며 떠있는 장면은 예술이다. 사람의 몸이나 옷이 바람을 품게 함으로써 대상을 역동적으로 포착해내는 것은 박흥용의 장기다. 누가 그녀를 종이 위에 선으로 그린 여자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장단을 맞춰주는 고수는 그녀의 자태에 넋을 잃어 박자를 놓친다. 고수는 이 모든 상황을 바람 탓으로 돌리는 내레이션을 들려준다. 

  • 〈쓰쓰돈돈쓰돈돈돈쓰돈돈쓰〉
    〈쓰쓰돈돈쓰돈돈돈쓰돈돈쓰〉

번개. 
천둥.
비.
바람...!

어랏!
끊어졌어! 
바람 때문에 삐삐선이 
끊어졌어
스삐꾸 먹통!

따라서 박흥용의 만화 주인공들은 바람이 있을 때 생명력을 갖는다. 박흥용이 1992년 발표한 단편 〈돼지의 날개〉의 첫 페이지. 술집 작부인 여주인공은 건물 옥상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린다. 그녀는 종이비행기가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고, 자신도 나체로 종이비행기를 따라가는 상상을 한다. 그러나 종이비행기는 기대와 달리, 뻗어 가지 못하고 건물 밑바닥에 처박힌다. 바람이 불지 않기 때문이다. 더 비참하게도 청소부 아저씨가 종이비행기를 쓸어 담는다. 술집 작부의 생활을 벗어나 멀리 달아나고 싶은 여주인공의 꿈은 이 작품에서 바람이 불지 않기 때문에 좌절된다.    
특정 공간에 갇혀 성장의 한계를 인식하는 박흥용의 만화 주인공들은 바람을 뒤쫓아 떠나고자 한다. 여기서 바람은 여행의 안내자이자 희망이다.    

2003년 한국일보에서 연재한 〈호두나무 왼쪽 길로〉의 공간은 큰 호두나무가 서 있는 충청북도 영동군 내궁골이다. 할머니와 함께 사는 꼬마 주인공 상복이는 돈 벌러 서울 갔다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호두나무 위에 올라가 영동역 기차 소리를 듣는다. 이 작품에서 무성한 잎을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호두나무는 꼬마 상복이의 아지트이자, 그가 알고 있는 세계의 경계지점이다. 바람이 호두나무를 스쳐 '솨아아아' 소리를 내자, 엄마에게 달려가고 싶은 상복이는 바위 위에 올라 두 팔을 벌리고 날아가는 자세를 취한다.

  • 〈호두나무 왼쪽 길로〉
    〈호두나무 왼쪽 길로〉

 '바람이 불면
나는 날개를 편다.
깃털 핥는 바람소리.
날아봐. 날아봐...'

  • 〈내파란 세이버〉

바람이 불 때마다 꼬마 상복이의 가슴은 들썩거린다. 어머니가 다른 곳에 시집갔다는 사실을 안 스무 살의 상복이는 호두나무를 불태우고 나를 찾는 여행을 떠난다. 오토바이를 여행길의 동반자로 삼은 그는 천천히 도로를 달리며 스스로 바람을 만든다. 

두 편의 미완성작 〈경복궁 학교〉(1996)와 〈그의 나라〉(2001)에서도 다양한 바람이 텍스트 속을 흘러 다닌다. 건물 붕괴 후 지하에 살아남은 일곱 명의 이야기를 그린 〈경복궁 학교〉는 박흥용의 만화에서 가장 여린 바람이 등장한다. 실바람이라 해야 할까? 콘크리트가 무너져 고립된 지하에서 생존자 일곱 명은 유일한 촛불을 밝힌다. 촛불은 한 방향으로 흔들린다. 바람이 있다는 증거다. 생존자 한 명은 “불이 흔들리는 걸 보라구요. 어딘가 밖으로 통하는 구멍이 있는 건 확실한데 말예요. 사람이 빠져나갈 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한다. 촛불을 흔드는 바람은 그들이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지 않았다는 희망을 준다. 가냘프지만 생명의 동아줄 같은 역할을 하는 이 실바람으로 인해 생존자들은 용기를 얻고 각자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준다.  

〈그의 나라〉의 바닷바람은 춘계수련회 차 여객선을 타고 여행 중인 주인공 ‘쌍판’을 무인도로 이끈다. 쌍판이 좋아하는 미술 여교사가 준 스카프를 장난기 심한 친구가 갑판에서 바다로 날린다. 바람의 장난이었을까? 스카프는 바닷바람을 타고 공중에서 너풀거린다. 쌍판은 공중에서 스카프를 낚아챈 후 바다로 떨어진다. 이 사건으로 인해 쌍판은 무인도에 갇혀 몇 년을 보내지만 전화위복으로 육지의 화학전쟁을 피해 살아남게 된다. 

〈그의 나라〉는 고립무원의 무인도와 그 섬의 유일한 주민인 쌍판이 빚어낸 새로운 바람을 선보인다. ‘붕붕’거리는 바람은 쌍판이 물매를 힘차게 돌릴 때 발생한다. 쌍판의 물매는 〈구름을 버서난 달처럼〉에서 견자의 칼과 대칭을 이룬다. 물매가 있는 한 쌍판은 무적이다. 물매의 '붕붕' 소리는 쌍판을 어디든 따라다닌다. 최근작 〈영년〉(2013)에서도 주인공은 물매의 달인이다. 〈영년〉은 물매로 싸우는 집단의 이야기여서 물매 돌리는 바람이 텍스트 전체에 더욱 거세다. 〈영년〉은 미완성작인 〈그의 나라〉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 〈내파란 세이버〉
    〈내파란 세이버〉

〈레드 존〉(1994)과 〈내파란 세이버〉(1998)은 가장 빠른 바람이 지배하는 박흥용의 만화다. 두 작품의 주인공들은 각각 오토바이와 경륜을 타고 거침없이 질주한다. 〈레드 존〉의 주인공은 오토바이를 타고 비행기를 따라잡는 짓에 거리낌이 없다. 

〈내파란 세이버〉의 주인공 쌕쌕이는 시속 80~90km의 속도를 내기 위해 바람과 싸운다. 그러나 경륜 선수 쌕쌕이는 견자나 쌍판과 마찬가지로 최고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먼저 바람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쌕쌕이는 자전거 위에 서서 두 팔을 벌리고 바람을 느끼기도 하고, 경주 때 다른 선수의 바람막이가 되기도 하고, 다른 선수를 바람막이로 이용하기도 한다. 결국 〈내 파란 세이버〉는 주인공이 '바람의 라이더'가 되는 성장 이야기다.   

'바람'이란 일관된 주제로 박흥용의 작품 세계 전체가 설명되는 것은 흥미롭다. 온순하게 생긴 작가 박흥용이 과거 오토바이 광이었으며, 두세 달씩 오토바이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 또한 그의 타고난 '바람기'를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이는 우연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데뷔작이 〈돌개바람〉(1981)이라는 점도 그가 '바람의 만화가'란 또 하나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기사입력 : 2014.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