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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사람

그 어떤 찰나에 맞물린 붓질과 소리의 질감,
백현진 인터뷰

안소연 (미술비평가)
  • 그 어떤 찰나에 맞물린 붓질과 소리의 질감, 백현진 인터뷰

백현진은 동시대의 미술현장에서 회화에 대한 특유의 실험과 탐구로 크게 주목받고 있는 작가다. 누군가는 그를 어어부 프로젝트의 보컬리스트로, 또 누군가는 홍상수 영화에 출연한 단역배우로도 알고 있을 텐데, 그렇다. 백현진은 미술, 음악, 영화 등 각기 다른 문화예술 영역에서 제 역할을 차지하며 꾸준한 활동을 이어왔다. 예술가로서의 그의 정체성에 대해 묻는다면, 사실 무엇이 먼저였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그는 홍익대 조소과 재학시절부터 〈어어부 프로젝트〉를 결성해 1990년대 문화의 자유분방함을 표출하듯 미술과 음악의 경계를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그 가운데서도 눈에 띄는 그의 미술계 행보를 보자면, 국내에서는 《산만과 실체》(아라리오갤러리, 2008)라는 전시를 시작으로 《디 엔드》(PKM gallery, 2010), 《열세 점+보너스》(두산갤러리, 2011) 등 다수의 개인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염기 섞인 붉은 책』을 제작한 2004년을 즈음해 그가 작가로서 모색하고 추구하기 시작한 특유의 태도들에 대해 가늠케 한다. 이제 그는 자신의 여덟 번째 개인전 《들과 새와 개와 재능》(PKM gallery, 2016)을 마쳤다. 26점의 그림과 전시기간 중 매일 정해진 시간에 수행했던 일련의 소리 퍼포먼스가 작가 백현진의 현재 상황을 공간 속에서 오롯이 보여줬다.


Q. 최근 PKM gallery에서 《들과 새와 개와 재능》(2016)이라는 제목으로 오랜만에 개인전을 열었고, 새 음악 앨범도 발표한 것으로 압니다. 흔히들 백현진 하면,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하고 종종 영화에도 출연하는 다양한 재능의 예술가로 떠올리기 쉬운데, 그 때문에 각각의 독립적이면서도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 백현진 작가의 활동에 대해 어떻게든 규정하려는 말들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가요? 소위 장르를 넘나드는 본인의 활동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기본적으로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 것처럼요. 어떻게 보면 자기 좋아서 막 그림 그리는 거랑 자기 좋아서 노래방에서 막 노래 부르는 거랑 도대체 뭐가 다르냐고 할 수 있는데, 사실 메커니즘은 어떤 측면에선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어요. 예전에 90년대에는 입장 정리를 하라는 말을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들었어요. 그러면 아주 잠깐은 정말 그래야 하나 싶기도 했는데, 가수로서 혹은 그때만 해도 시인에 대한 열망도 있었으니까 시인으로서, 아니면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 어떤 분명한 입장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던 거죠. 그런데 차츰 내가 느낀 건 그들이 원하는 입장 정리를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냥 내가 생각하는 다른 사람이 되려고 나는 실시간으로 노력을 하면 되는 것이고 그래서 다른 사람이 되면 그 다른 사람이 지금과는 또 다른 삶을 사는 것이고 또 다른 작업을 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사실 굉장히 간단한 얘기예요. 그리고 나는 보통 내 작업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해요. 내가 삶을 잘 모르면서 살아가는 것과 같은 거예요. 삶을 살아가는 양상과 작업을 해나가는 양상이 서로 더 닮기를 희망해요. 그것의 싱크로율을 더 높이고 싶어요.

Q. 그래서인가요, 어떻게 보면 백현진 작가의 그림과 노래는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매우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러한 느낌을 말하기 위해 “뭉갠다”는 표현을 쓰고 싶은데요. 그림과 노래의 경계가 거칠게 뭉개져 있을 뿐 아니라,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도 정확히 알 수 없는 흐릿한 지점들이 강하게 돌출돼 보입니다. 마치 의도한 듯 말이에요. 말하자면, 그림의 형태건 표면이건 혹은 노래의 가사건 음의 소리건 간에 뭔가를 그리다가 지워버린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말하다가 뭉개버리는 것 같은 애매함과 심지어 거기서 오는 정체 모를 냉소까지 느껴지곤 합니다.

물리적으로 긴 시간들을 통과하다 보면, 가끔씩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건가 혹은 어떤 지점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 쌓여있었던가를 일종의 부감샷으로 보게 돼요. 오히려 그때그때 뭔가를 정확히 알아채면서 일을 하지는 못해요. 심지어 어떤 결말이나 목표를 알고 가는 것에 대해 나는 굉장히 재미없어해요. 이 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호기심이나 실시간으로 반응하며 일을 보는 즉 흥성이 제 동력 중에는 굉장히 큰 건데, 보통 설계도나 청사진이라고 부르는 그런 것들이 내 앞에 있으면 그때부터 나는 지루해지는 것 같아요. 말 그대로 그런 것들을 갖고 얼마나 견고하게 마무리할 것인가에 매달리는 게임에는 전혀 관심 없어요. 사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목표를 정해서 하나의 상(像)을 만들어 놓고 살겠다는 건데, 나는 사실 그런 거 안 믿거든요. 미안하지만 그런 상들을 나는 가짜 같은 허깨비라고 생각해요. ‘그럼 진짜는 뭐예요’라고 누군가 물어보면 그건 나도 몰라요. 하지만 가짜 허깨비는 느껴져요. 그리고 보통은 그게 가짜여도 상관없다는 것도 이제는 알겠어요. 예전에는 그 가짜들 때문에 진짜 화가 많이 났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나는 그냥 내 볼일을 보면 되는 거니까요.

뭉갠다는 말을 했는데, 뛰어난 보컬리스트라고 손꼽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기술이라는 게 있어요.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에게는 사람 사는 복잡한 일들을 이렇게 저렇게 실어 나를 수 있는 특별히 예민한 감정의 수레와 각자 나름의 기술이 있어요. 그 기술들이라는 것도 음악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인데, 사실 음악 전에 사운드라는 게 있는 거잖아요. 그 사운드에는 인간이 그냥 내는 소리들, 음악이라는 것으로 만들어지기 전에 다루어지는 소리들이 있어요. 그런 것들이야말로 뮤지션으로서 내가 좋아하는 자료들 중의 하나인데, 그게 가수로서 테크닉을 버린다는 말은 아니고 기술이 작동되는 상태에서 어느 순간에 고함을 친다거나 읊조리는 식의, 다시 말해 영역 밖에 위치한 육성들을 끌어들이며 목소리에 관계된 음악적 테크닉과 뭉개버려요. 그림 그릴 때와 마찬가지로 보통은 소리를 낼 때도 별생각이 안 나는데, 가끔씩 어떤 순간에 내가 소리를 내면서 동시에 이걸 뭉개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긴 해요. 그림도 마찬가지고요.

Q. 그런 양가적인 태도가 결국 냉소적인 모습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 같은데요. 예컨대, 이번 개인전 《들과 새와 개와 재능》을 두고 많은 기사와 리뷰가 있었는데, 많이 인용됐던 “마음대로 보라”는 작가의 말이 편하게 들리지는 않더라고요. 애초에 불통(不通)을 염두에 둔 작가의 시니컬한 발언처럼 들리기도 했고요.

그 문장은 간단해요. 맘대로들 하시라는 말 그대로예요. 예전에는 그게 굉장한 냉소를 표현한 말이었는데, 뭐 지금은 그런 정도의 냉소는 아니에요. 내 그림을 보고 그냥 마음대로 규정하시고 마음대로 보셔도 된다는 거예요. 또 그 말은 나도 그냥 내 마음대로 내 볼일 보면 된다는 거니까요. 보이는 대로 보라는 것은 제가
오래전부터 갖고 있던 태도였어요. 그 태도도 어떤 뉘앙스의 차이가 있긴 한데, 정말 “맘대로 보세요, 맘대로들” 하면서 분노가 꽉 차 있을 때도 있었죠. 어떤 불특정 다수들, 그 대상들에 대한 분노를 가졌던 때가 분명히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사람들이 보이는 대로 보는 게 맞는다는 것을 알겠어요.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고 와서 “저거 빵처럼 보여요”, “시장에 있는 알록달록한 것처럼 보여요”, 혹은 “독일 어떤 작가들 같아요”라고 하면, 그렇게 마음대로들 보셔도 돼요. 정말로요. 그리고 보통 그림의 제목들도 대부분 우연히 만들어지는데, 예를 들면 이번 전시에서 〈그것이 무엇으로 보이든 그것은 당신의 것〉(2014-2015)이라는 그림이 있었거든요. 그게 그냥 내 마음이에요. 내 그림을 사람들한테 보여줄 때 “그것이 무엇으로 보이든 그것은 당신의 것”이라는 말이 그냥 나의 깨끗한 마음인 거예요.

사실 내가 냉소를 많이 사용했던 사람이긴 하죠. ‘분노’, ‘냉소’, ‘농담’, '관조' 같은 낱말들이 기억나는데, 그런 단어들이 제가 그림 그릴 때 큰 요소로 작용했던 때가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냉소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어요. 내 몸에 아직 남아있긴 하겠지만, 오히려 냉소에 대한 어떤 부분들을 걷어내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해요. 그게 청년 시절에는 나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일종의 화 같은 것이었다면, 지금은 좀 더 명료하고 컨트롤 할 수 있는 상태에서의 분노 정도라고 할 수 있어요. ‘나를 사라지게 만들겠어’라든가 ‘세계를 부숴버리겠어’ 하는 식의 분노 말고, 이제는 명확한 어떤 대상을 향해 계속 계란이라도 던져서 더럽게라도 하고 싶은 그런 거죠. 내가 상업갤러리들에서 전시를 하고 있지만, 내가 불신하는 정부나 기업이나 신자유주의 따위에 대해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어떤 식으로라도 행동을 취하는 동시에 예술가로서 계속할 수 있는 일들은 해야죠.

Q. 이번 전시가 국내에서 열었던 개인전으로는 다섯 번째인 걸로 아는데요, 해외 전시까지 포함하면 꽤 많을 거예요. 최근 몇 년간 회화에 관심이 부쩍 커진 가운데, 그러한 흐름의 한 축을 담당해 왔던 백현진의 그림에 대해서는 미술계의 큰 관심에 비해 비평적 접근이나 대중과의 시각적 소통은 다소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 온도 차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요?

국내외 개인전을 모두 합하면 이번 전시가 여덟 번째였어요. 2008년 첫 개인전 제목이 《산만과 실체》였는데, 전시를 본 사람들이 그림이 너무 안 보인다는 거예요. 제목을 그렇게 해놨더니, 사람들이 순진해서 그 말에만 현혹돼서 계속 산만하다는 거예요. 사실 그림이야 꼼꼼히 보려는 사람들에게는 공간의 조건이나 환경이 그다지 문제가 안 돼요. 나는 그때의 개인전이 그 어떤 사람들, 그러니까 우리들의 머릿속 보다 훨씬 덜 산만했던 것을 알아요. 또 2011년 두산에서 전시할 때는 일종의 초상, 그걸 나는 얼굴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데 아무튼 그런 그림을 그려서 보여줬어요. 대도시 사람들의 얼굴 기운들을 포착하고 싶어서 단순한 형태의 동그라미에 코 하나 입 하나라는 식의, 말하자면 어떤 신호(signal)로만 일을 봤었던 거예요. 대도시에서 경험한 사람들의 기운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한국, 뉴욕, 런던 등의 대도시와 국가 시스템이 투명하고 좋다는 헬싱키나 코펜하겐에서 본 사람들까지도 쓸쓸해 보이고 지쳐 보였어요. 그렇게 말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럼 당신의 목표는 쓸쓸함을 기록하는 거냐’ 하더라고요. 어떻게 그렇게 단순하게 일을 보겠어요?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일을 보죠. 예를 들면, 단순하게 그런 얼굴의 기운을 기록해야지 하면서도 어떤 색 하나 때문에 상황은 되게 복잡해지기도 해요. 겨울인데 산에서 초록색 풀 같은 것을 보면 멈추게 될 때가 있어요. 어쩌면 그 사람은 건강 때문에 산에 갔을 수도 있을 테지만, 거기 멈췄을 때는 건강을 위해 멈춘 것이 아니잖아요. 말 그대로 그 색깔 때문에, 즉 물리적 파장에 의해 인간에게 감각되고 지각되는 그 색 때문에 그냥 멈추는 거라고요. 내가 그림을 그릴 때, 어떤 큰 방향을 따라 추적하고 동시에 기록하며 홀린 듯 움직이다가 종종 예기치 않게 구석의 초록색이나 보라색 때문에 반나절을 보내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런데 가끔 그런 내 그림을 앞에 두고,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붓질’로만 반골 냄새도 좀 나고 처연한 뭔가를 표현하고 있는지 누군가가 얘기하는 것을 들으면 내가 완전히 방향을 잃고 헤매는 중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Q. 일반적인 용어들 대신 ‘붓질’, ‘소리’, ‘일 본다’ 등의 직접적이고 아주 단순한 표현들을 고집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냥 그런 게 편해요, ‘작업한다’는 말보다는 ‘일 본다’는 말이 더 편하고, ‘작품’이라는 말보다는 ‘물건’이라고도 하고 ‘사물’, ‘물질’이라고도 하는데 그런 표현들이 전반적으로 더 편한 것 같아요. ‘회화’나 ‘페인팅’보다는 ‘그림’이나 ‘보이는 것’이라는 말을 사용해요. 말해 보면 그런 게 더 편해요.

Q. 어떻게 보면 백현진 작가의 작업 방식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붓질’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한 말인지도 모르겠어요. 작업을 위한 그 어떤 구상도 하지 않은 채, 거의 즉흥적으로 작업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이야말로 붓질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그건 이렇게 얘기해 볼게요. 나는 자연에서 인간이 랜덤으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세계를 이해하는 태도로 캔버스도 그렇게 다루면 된다는 것을 어느 날 그냥 알게 됐어요. 그때부터 그림 그리는 방법을 사람 사는 것이랑 비슷하게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전에 가족들이 임종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셔서 뭔가 뚝 끊기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었어요. 그걸 겪고 나서 작업을 어떻게 끝내본 적도 있냐면, 그냥 그리다가 어느 순간 아무 대책 없이 갑자기 붓을 놓고 그림을 끝내버렸어요. 말 그대로 그냥 이렇게 저렇게 살아보는 것처럼 또 이렇게 저렇게 그림을 그려보는 거예요.

Q. 그런 즉흥적인 붓질에 백현진이라는 작가의 성향과 태도가 깊이 배어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비슷한 관점에서 작가가 다루는 매체의 폭도 매우 즉흥적이면서 유연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이 말에 공감한다면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2000년대 중반, 아라리오 갤러리 소속 작가로 전시 준비를 하면서 유화가 내 몸에 잘 맞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렇다고 유화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고 나한테 무리 없고 잘 맞는 매체라서 사용하는 건데 그것을 사용할 수 없을 때는 뭐라도 갖고 그림을 그리면 되는 거예요. 사실 현대미술에서 회화에게 사망 선고를 내리든 부활의 폭죽을 터뜨리든 별로 개의치 않아요. 전 그립니다. 그림을 위한 재료도 무엇이건 별 상관은 없고요. 나는 돈 제일 안 쓰고 하염없이 그림 그릴 수 있는 매체도 알아요. 전에 샤프심으로 그린 드로잉을 모아 『염기 섞인 붉은 책』을 만들기도 했거든요. 또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몸을 갖고 뭘 하는 거예요. 보컬리스트로 제법 오랜 생활 육체를 다뤄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 같아요. 그리고 2000년대 초반에는 아트선재센터에서 1년간 그래픽 디자이너로도 일해봤어요. 그러다가 2003년도에 그 일을 갑자기 그만뒀는데, 먹고살 만해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중요한 결심을 한 거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돈벌이를 할 수 있는 수단을 놓긴 놨는데 그 상태에서 너무 할 게 없고 스스로 한심하니까 샤프심을 가지고 하루 한 장이라도 드로잉을 그렸던 것이고, 그걸로 나중에 『염기 섞인 붉은 책』을 만든 거예요. 또 그 책을 계기로 지금에 이르는 운신의 폭이 생긴 거죠.

백현진은 줄곧 직설적인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냈지만, 그 어떤 것으로도 자신을 규정하거나 의미 지으려 하지 않는다. 마치 노래라기보다는 소리에 가깝고 그림이라기보다는 붓질에 가까운 그 면면의 행위들처럼, 백현진은 최근 즉흥적인 현실의 상황 속에서 그의 표현대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하는 일들”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의 붓질은, 일련의 형태를 그리고(드러내고) 다시 지우는(감추는) 비생산적인 반복을 통해 결국 아무것도 아닌 표면의 질감을 잔뜩 생산한다. 그가 허공에 뱉어내는 수수께끼 같은 소리들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돌발적인 감각에 의해 허공으로 쏟아져 나온 소리들은 그야말로 캔버스 위에 뭉개놓은 물감 자국들처럼 거친 질감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그것이 백현진의 그림과 노래, 혹은 붓질과 소리가 경계 없이 만나는 탁월한 지점일 것이다.


  • 《들과 새와 개와 재능》 전시 전경
    《들과 새와 개와 재능》 전시 전경
  • <그것이 무엇으로 보이든 그것은 당신의 것>(2014-2015)
    〈그것이 무엇으로 보이든 그것은 당신의
    것〉 (2014-2015)
  • <벡터건 픽셀이건 나발이건>(2015)
    〈벡터건 픽셀이건 나발이건〉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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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6.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