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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통신

[일본] 보컬로이드, 일본 전통예능의 구원자로 나서나

장지영 (국민일보 기자)
  • 런던 ‘하이퍼 재팬’ 행사에서 상영 중인 〈보컬로이드 오페라 아오이노우에 with 분라쿠 인형〉
    런던 ‘하이퍼 재팬’ 행사에서 상영 중인 〈보컬로이드 오페라 아오이노우에 with 분라쿠 인형〉

단편영화는 장르의 속성상 평단과 대중의 관심을 불러 모으기 어려운 편이다. 그런데 올가을 일본에서 매진 사례를 기록해 연장 상영하는 것은 물론 언론이 앞다퉈 다루고 있는 작품이 있다. 지난 9월 10~15일 도쿄의 예술영화 전용관인 ‘미니 시어터’에서 공개된 34분짜리 단편영화 〈보컬로이드 오페라 아오이노우에(葵上) with 분라쿠 인형〉이다.
지난 7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페스티벌 ‘하이퍼 재팬’에서 처음 소개돼 주목을 받았던 이 작품은 인간이 일절 등장하지 않은 채 전통인형극인 분라쿠의 인형이 연기하는 오페라 무대를 촬영한 것이다. 전통악기의 소리를 도입한 테크노 음악을 바탕으로 분라쿠 인형이 음성 합성 소프트웨어인 보컬로이드의 노래를 부른다.
일본의 최첨단 테크놀로지와 300년 역사를 지닌 고전예능의 만남으로 런던 프리미어 상영 당시부터 호평을 받았던 이 작품에 워낙 관객이 몰리자 제작사는 9월 20일부터 일주일간 연장 상영했다가 다시 일주일을 재연장해 10월 3일까지 상영해야 했다. 이후 나고야 등 지방에서의 상영이 속속 결정되는 한편 작품의 연출가, 작곡가, 프로듀서 등 크리에이티브팀에게는 각종 강연 요청이 쏟아지고 있다. 

  • 〈THE END〉 포스터
    〈THE END〉 포스터

l 하츠네 미쿠를 앞세운 보컬로이드가 일으킨 혁명

보컬로이드는 ‘보컬+안드로이드’의 합성어로 일본 야마하가 제작한 음성 합성 소프트웨어의 명칭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웹진 아르코 2013년 6월 27일 238호에 게재한 세계 최초의 보컬로이드 오페라 〈THE END〉에서 하츠네 미쿠 등 보컬로이드를 소개한 바 있다. 하지만 아직 순수예술 분야에서는 보컬로이드가 생소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설명한다. ※ [웹진 아르코 238호 보러가기] 


2004년 처음 등장한 보컬로이드는 가사와 멜로디를 입력하면 인공적으로 사람의 목소리로 된 노래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컴퓨터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음악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보컬로이드의 판매를 맡은 크립톤퓨처미디어는 사용자들이 소프트웨어를 친숙하게 여길 수 있도록 캐릭터를 덧붙였다.


특히 2007년 일본의 여자 성우 후지타 사키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16세 녹색머리 소녀 캐릭터 하츠네 미쿠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됐다. 소프트웨어 패키지에 그려져 있던 한 장의 캐릭터 이미지로 시작된 하츠네 미쿠는 발매 5일 후 일본의 동영상 사이트인 ‘니코니코(www.nicovideo.jp)’에 Otomania라는 닉네임의 이용자가 1930년대 핀란드 노래 〈이에반 폴카(Ievan Polkka)〉를 올리면서 ‘디지털 아이돌’이 됐다.

하츠네 미쿠가 노래를 부르며 커다란 대파를 돌리는 이 동영상은 네티즌들 사이에 하츠네 미쿠를 이용한 2차 창작 열풍을 불러일으켰

다. 처음엔 기존의 노래를 하츠네 미쿠가 부르는 동영상이 올라왔으나 점차 아마추어 작곡가들이 만든 신곡을 부르는 경우가 늘어났다. 그리고 이런 곡들 가운데 일부는 일본의 메이저 음반회사를 통해 다시 유통되었으며 오리콘 차트 상위에 종종 랭크됐다. 이런 2차 창작 열풍은 크립톤퓨처미디어가 하츠네 미쿠 캐릭터에 대해 비영리인 경우 자유로운 이용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후 유명 작곡가들도 앞다퉈 하츠네 미쿠를 활용해 신곡을 발표하는 경우도 속속 나왔으며, 이에 대해 하츠네 미쿠를 앞세운 보컬로이드가 음악계에 혁명을 초래했다는 평가가 나온 바 있다.
하츠네 미쿠는 이후 애니메이션, 게임, 피규어 등의 관련 상품을 만들어냈다. 특히 일본 게임 회사인 세가는 크립톤퓨처미디어 등과 손잡고 리듬 게임인 ‘하츠네 미쿠-프로젝트 디바’의 인기몰이에 성공한데 이어 ‘하츠네 미쿠 3D 입체 홀로그램 콘서트’를 열었다. 이 콘서트는 2010년 하츠네 미쿠 팬들을 위해 단발성 이벤트로 기획됐지만 매번 열광적인 호응을 얻어서 2012년엔 인기 있는 가수들만 설 수 있는 도쿄돔에서 이틀간 4회 공연을 모두 매진시키는 기염을 토한 바 있다. 특히 기술력이 더해진 하츠네 미쿠는 이제 1년에도 여러 차례 일본의 대형 공연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여는 것은 물론 미국과 싱가포르 등 해외에서도 인기리에 공연을 열고 있다. 한국에서는 2011년 8월 ‘하츠네 미쿠 라이브 파티 2011 In 삿포로’ 공연의 극장 상영회가 6분 만에 전 좌석이 매진될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


네티즌의 동인 문화로 시작된 하츠네 미쿠는 이제 테크놀로지와 예술이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형식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2012년 무렵부터 일본을 넘어 해외에서도 하츠네 미쿠가 만들어낸 패러다임에 주목하고 있는 모습이다. 세계적인 인터넷 기업 구글과 프랑스의 명품 브랜드 루이뷔통이 하츠네 미쿠를 모델로 발탁하는가 하면 팝스타 레이디 가가는 올해 자신의 미국 투어 오프닝 공연에 하츠네 미쿠를 세웠다. 또 지난해 캐나다 디스커버리 채널은 하츠네 미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했고, 지난 10월 8일 미국 CBS의 인기 토크쇼인 ‘데이비드 레터맨의 더 레이트쇼’는 하츠네 미쿠를 초대해 라이브 공연을 열기도 했다.
순수예술 분야에서도 하츠네 미쿠에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2012년 일본의 저명한 작곡가 토미다 이사오는 자신의 〈이하토브 교향곡〉 초연에 하츠네 미쿠를 솔리스트로 출연시켰다. 하츠네 미쿠는 일본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등 300여 명의 연주에 맞춰 라이브로 노래하며 춤췄다. 이 콘서트는 초연 당시 평단과 관중의 호평을 받아 지난해 전국 투어가 열렸다. 
그리고 2012년 12월 일본 야마구치현 야마구치예술센터에서는 전자음악 작곡가 시부야 케이이치로, 극작가 겸 연출가 오카다 토시키에게 의뢰해 만든 세계 최초의 보컬로이드 오페라 〈The End〉가 공연됐다. 이 작품은 인간이 전혀 나오지 않은 채 하츠네 미쿠가 오페라 창법으로 노래하는 것이 특징이다. 2013년 5월 도쿄 공연에 이어 11월 프랑스 파리 샤틀레 극장에도 초대되는 등 관객과 평단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오페라, 교향곡부터 영화 및 드라마 음악, 게임 음악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유명 작곡가 사에구사 시게아키 도쿄음대 교수는 지난해 9월, 2020년 도쿄올림픽 유치가 결정된 뒤 올림픽 공식 주제가를 부를 가수로 세계적인 붐을 일으키고 있는 하츠네 미쿠를 제안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의 음악감독을 맡는 등 일본의 국제 행사에서 단골로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그는 현재 하츠네 미쿠를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을 만들고 있다.

l 보컬로이드를 앞세워 젊은 관객의 관심을 끄는 전통예능

노(能), 분라쿠(文樂), 가부키(歌舞伎), 교겐(狂言)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전통예능은 한국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보존이 잘 된 편이다. 에도시대부터 대도시에 이들 장르의 상설공연장이 생기고 전문적 배우 집단이 생겨나 현대까지 상당 부분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치카와, 마츠모토, 나카무라 등 배우 가문이 수백 년을 이어가며 번성하고 있으며 가부키가 아시아 전통예술 장르 중에서는 지금도 유일하게 상업적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전통예능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점점 젊은 층의 외면을 받고 있다. 노나 분라쿠 등의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은 대부분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다. 게다가 전통예능에 대한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 역시 과거에 비해 대폭 삭감되고 있는 추세여서 위기감이 팽배한 상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통예능이 젊은 층을 붙잡을 방법으로 생각한 것이 하츠네 미쿠로 대표되는 보컬로이드와의 콜라보레이션이다. 최근 대단한 화제를 모은 단편영화 〈보컬로이드 오페라 아오이노우에 with 분라쿠 인형〉의 경우 지난해 6월 보컬로이드 팬들이 개최한 ‘세계 보컬로이드 대회’에 분라쿠의 유명한 인형 조종사인 요시다 코스케가 초청된 것이 계기가 됐다.
하츠네 미쿠가 분라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은 이미 여러 이벤트에서 소개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행사 주최 측에서 하츠네 미쿠와 일본의 전통인형극인 분라쿠 인형과의 관련성에 집중해 요시다를 불러 ‘인형극의 방법론-하츠네 미쿠로 이어지는 계보’를 발표하도록 한 것이 기폭제가 됐다. 당시 분라쿠 인형을 가지고 하츠네 미쿠의 유명한 히트송인 〈멜트〉에 맞춰 춤을 선보였던 요시다 역시 보컬로이드에서 분라쿠의 부활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보컬로이드 제작 및 판매사인 AHS의 기획에 의해 〈보컬로이드 오페라 아오이노우에 with 분라쿠 인형〉이 나오게 됐다.
〈보컬로이드 오페라 아오이노우에 with 분라쿠 인형〉은 일본의 유명한 고전인 〈겐지모노가타리〉에 나오는 ‘아오이’ 편의 일부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이다. 작곡가 히카루와 그의 연인인 인기 가수 아오이 사이에 일어난 기묘한 하룻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을 위해 일본의 전통악기의 소리를 넣은 테크노 음악이 새롭게 제작됐으며 AHS의 보컬로이드인 유즈키 히카리와 네코무라 이로하, 야마하의 VY1V3이 사용됐다. 그리고 요시다 등 5명의 인형 조종사가 참가했다. 작곡가 겸 작사가인 타마와리 히로시가 대본부터 작곡, 무대 구성까지 담당했다.
또 다른 전통예능인 노(能)에서도 보컬로이드와의 합작이 나온 바 있다. 교토에 기반을 둔 극단 소세이좌는 지난 7월 4일 유명한 노 레퍼토리인 ‘도조지 설화’를 모티브로 한 〈보컬로(이드) 도조지〉를 선보여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기요히메가 흠모해온 승려 안친에게 배신당한 뒤 증오심 때문에 뱀으로 변해 종 속에 들어간 원작을 새롭게 각색한 〈보컬로 도조지〉는 하츠네 미쿠가 기요히메로 나오는 영상을 공연에 앞서 제작하는 한편 실제 공연에는 일본 전통무용가가 하츠네 미쿠로 분장한 뒤 무대에 등장했다. 이 작품은 공연 전부터 화제를 모아 티켓 구하기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외에도 일본 전통악기들로 하츠네 미쿠의 인기 곡들을 연주하는 밴드가 등장하는 등 최근 일본 전통예능에서는 하츠네 미쿠를 이용한 실험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젊은 층의 관심을 끌어모으는데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둔 만큼 앞으로도 하츠네 미쿠를 포함한 보컬로이드가 등장하는 전통예능 작품이 계속 나올 전망이다.


  • 〈보컬로 도조지〉 실제 공연
    〈보컬로 도조지〉 실제 공연
  • 〈보컬로 도조지〉 실제 공연
     
  • 〈보컬로 도조지〉 영상
    〈보컬로 도조지〉 영상
아르코 로고

[기사입력 : 2014.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