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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통신

[네덜란드] W139, 롱롱(Rongwrong),
그리고 산 세리페(San Serriffe)

(암스테르담 중심가에 있는 문화/예술 공간들)

오민 (작가)
  • W139의 기획 전시 <누룩(C’hu)>
    W139의 기획 전시 〈누룩(C’hu)〉


제법 쌀쌀해진 10월, 암스테르담의 가장 오래된 골목길 중 하나인 발머스트라트(Walmerstraat) 139번지에 비일상적인 스팀 목욕탕이 오픈했다. 사이키델릭한 조명과 명상을 유도하는 나른한 목소리, 그리고 뿌연 스팀으로 가득 찬 모습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관광객들의 발걸음 속도와 사뭇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이는 이 스팀 목욕탕은 실제 목욕탕이 아니라 미술 공간 W139에서 진행되는 기획 전시 〈누룩(C’hu)〉을 위한 프로젝트이다.

암스테르담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W139는 주로 젊은 작가들의 리서치와 실험을 소개하는 대안적 미술 공간으로, 자신들의 작업을 독자적인 방법으로 소개하고 싶었던 5명의 게릿 리트벨트 아카데미(Gerrit Rietveld Academie) 졸업생, 거스 반 데어 베르프(Guus van der Werf), 마리안 크로넨버그(Marianne Kronenberg), 마르타 크라인스(Martha Crijns), 레이나우트 베이돔(Reinout Weydom), 아드 드 용(Ad de Jong)에 의해 설립되었다. 1979년 시작되었으니 올해로 36년째를 맞이하는 나름 이 지역의 터줏대감인 셈이다. 새롭고 다채로운 형태의 이벤트들 때문인지 혹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인지 최근 암스테르담의 젊은 예술가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파티 장소로 인식되는 경향도 있지만, 전시에 초대되는 작가들과 프로그램들만을 고려한다면 W139가 사회적 현상들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과 대화를 주도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W139는 매년 젊은 작가들을 초대하여 각자의 연구 주제와 관련된 그룹 전시를 기획하도록 요청한다. 올해 초대를 받은 작가 중 세타노 카르발호(Caetano Carvalho)는 일반적인 그룹 전시 형태를 벗어나 자신과 유사한 관심사를 공유한 작가들과 함께 하나의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고, 알고리듬과 기계적 혹은 생물학적 프로세스와 그 정치적 사용에 관심이 있던 카르발호는 참여 작가들과 함께 프랑스 저술·행동가 그룹 티쿵(Tiqqun)이 발표한 〈사이버네틱스 가설 (The cybernetic hypothesis)〉에 대한 스터디를 바탕으로 스팀 목욕탕 〈누룩(C’hu)〉을 공동 기획하였다. 인간의 몸을 시스템으로 규정,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시스템을 직접 인지하고 체험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감각적인 실험의 결과물이다.

아침 8시에서 11시, 저녁 6시에서 9시 사이에만 작동하는 이 스팀 목욕탕을 경험하기 위해서 관객들은 특별한 복장(수건 혹은 그에 상응하는 옷차림)과 적극적인 참여 의지를 먼저 준비해야 한다. 욕실에 들어서면 명상을 유도하는 체조의 지시문을 듣게 된다. 오쇼 라즈니쉬(Osho Rajneesh)의 명상문을 기반으로 작성된 이 지시문은 느리면서도 절도 있는 목소리를 통해 관객들에게 심각함과 우스꽝스러움의 경계를 넘나드는 동작들을 수행하도록 요구하며 스팀룸으로 들어가기 전 그들의 몸과 마음을 준비시킨다. 시야를 흐릿하게 만드는 강한 스팀은 보리스 비앙(Boris Vian)의 단편 〈사랑은 눈먼 장님(Love is Blind)〉에서 영감을 얻은 장치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외부 환경에 대한 지각능력이 떨어지면서 오히려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자신의 몸의 미세한 움직임을 민감하게 감지하게 되는 상황을 조성한다. 한편, 사우나 곳곳에는 몽환적인 불빛 아래 몇 가지 화초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들은 환각을 일으키는 식물들로서, 인간이라는 시스템의 활동성과 기능성을 증가시키기도 하고 둔화시키기도 하는 등 인간 행동 제어와 관련 있는 약물에 대한 대응점이다. 스팀, 목소리, 식물, 이 세 가지 요소는 관객들의 수동적, 자발적, 무의식적인 반응과 참여를 유도한다.

앙드레 아벨라즈(André Avelãs), 페르난도 벨피오레(Fernando Belfiore), 리비디웅가 카르도소(Libidiunga Cardoso), 루나 에거스 마츠(Luna Eggers Matz), 요세프 니에르징어(Joseph Knierzinger), 코란 고키 쿠직(Goran Goki Kusic), 마리아 네트제르(Maria Netzer), 호프 필립(Hopf Philipp), 클라라 사이토(Clara Saito), 지자 손(Jija Sohn), 한스 피서스(Hans Vissers), 로즈마린 드 네베(Rozemarijn de Neve), 타이스 드 제이우브(Thijs de Zeeuw), 논스튜디오(non/studio), 아르다 반 티겔렌(Arda van Tiggelen)의 참여로 완성된 스팀 목욕탕 〈누룩〉 프로젝트는 공연, 세미나, 프리젠테이션을 결합한 복합 프로그램인 〈어리석은 부호: 저항적 사용(Idiotic Code: On Resistant Usership)〉과 함께 오는 11월 7일까지 계속 진행된다.

W139를 벗어나 발머스트라트를 따라 암스테르담 중앙역 쪽으로 걸어 올라와 차이나타운을 가로지르면 홍등가와 바, 커피숍(네덜란드 내에서 합법으로 인정된 향정신성 제품을 파는 곳), 섹스숍의 화려한 네온사인과 관광객 인파의 열기가 갑작스럽게 가라앉으며 언제 그랬냐는 듯 침착한 분위기로 변모한다. 운하를 건너 비넨 반타머스트라트(Binnen Bantammerstraat)로 접어들면 곧 평범하지 않은 예술 공간 롱롱(rongwrong)에 다다르게 되는데, 작고 협소한 공간적 특징 때문인지 롱롱에 들어서는 순간 여타의 예술 공간들과는 달리 누군가의 집에 사적으로 초대된 느낌을 받게 된다. 전시 공간인 동시에 예술, 이론, 문화, 문학이 교류하고 내밀한 대화의 장소가 되기를 바라는 이 예술 공간은 2011년 설립되었다. W139에 비하면 신생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롱롱은 드 할렌(De Hallen)에서 젊은 큐레이터에게 수여하는 펀드를 시작으로 아니사 제코(Arnisa Zeqo)와 안토니아 카라라(Antonia Carrara)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미술 작가인 빈센트 베어호프(Vincent Verhoef), 폰즈 웰터스 갤러리(Galerie Fons Welters)의 디렉터 로리 클라우츠만(Laurie Cluitmans)과 공동 운영되고 있다. 롱롱의 프로그램들은 특별한 미적 태도를 지향하기보다는 인간과 삶에 관한 긴급하고 중대한 주제들을 전제로 암스테르담의 미술 커뮤니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작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촉발된다. 이들 운영진이 기획하는 프로그램 이외에도 젊은 큐레이터들을 지원하려는 방안으로 1년에 한두 회에 걸쳐 객원 큐레이터를 초대하여 프로그램을 구성하기도 한다.

롱롱은 단지 젊은 작가들만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신세대 작가들과 구세대 작가들의 교차점을 형성하는 것에 관심을 보인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마술 버스와 이야기들(The Magic Bus & other stories)〉 전시에서는 과거 롱롱의 공간을 스튜디오로 사용하던 라울 도먼(Raoul Dohmen, 1944~2005)의 파트너이자 미술 작가 르네 제이콥스(Renate Jacobs, 1947~)의 과거 및 현재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이와 동시에 지난 10월 28일, 6평 남짓 작은 지하실에서는 2006년 결성된 액티비스트 그룹 퍼블릭 무브먼트(Public movement)의 활동을 소개하는 알레나 카트소프(Alhena Katsof)의 토크가 진행되었다. 퍼블릭 무브먼트는 규정, 압력, 조직, 원칙, 정체성 확립, 공공을 관장하는 의식 시스템과 관련한 정치적 사안과 행동들을 연구하고 집단행동의 정치적, 미적 가능성을 모색해왔으며, 밀도 높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공공 안무를 구성하고, 공개적 혹은 비공개적인 의식과 공연을 기획해 왔다. 이렇게 매우 다른 시대와 성격과 접근 방식이 충돌하는 롱롱의 불연속적인 프로그램 구성은 지루할 틈 없이 ‘현재’에 집중하고자 하는 롱롱의 지향점을 드러내며, 가벼움과 진지함 사이의 독특한 균형을 보여준다.

한편, 롱롱에서 퍼블릭 무브먼트의 토크가 있던 다음 날인 29일, W139에서 멀지 않은 홍등가 사이에 자리 잡은 예술서점 산 세리페(San Serriffe)에서는 공간개념을 다루는 사진과 대형 설치물들을 결합하여 2차원과 3차원의 경계를 탐색하는 아누 바투라(Anu Vahtra)의 아티스트북 〈무제(Untitled)〉의 출판기념행사가 열렸다. 독립출판물들이 활발하게 제작되고 있지만 서점들은 점차 사라지고 있던 2011년 암스테르담에서 두 명의 그래픽 디자이너 피에터 베르베커(Pieter Verbeke)와 엘리자베스 클레먼트(Elisabeth Klement)에 의해 시작된 산 세리페는 단순한 예술서점이라기보다는 강연, 공연, 작은 전시들이 이루어지는 복합 문화공간이다. 서울의 북소사이어티, 파리의 카스티요 코랄레스(castillo/corrales)와 유사한 성격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산 세리페는 매달 평균 3~4개의 이벤트를 기획하고 소화하면서 암스테르담의 젊은 작가들과 디자이너 커뮤니티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W139, 롱롱, 그리고 산 세리페는 각각 다른 성격과 크기,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현재’와 ‘여기’에 주요한 관심을 가진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암스테르담을 방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암스테르담에서 숨 쉬고 있는 사람들과 또 그들의 삶과 바로 맞닿아 있는 곳에서 사회, 문화, 예술에 대해 고민하는 이 예술 공간들을 방문해 보는 것은 어떨까?


  • 예술 공간 롱롱(rongwrong)
    예술 공간 롱롱(rongwr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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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5.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