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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동규의 이심전심
고수와 하수 ‘바보가 이긴다’

이동규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 /  창조경영MBA 주임교수)
  • 난득호도(難得糊塗)
    난득호도(難得糊塗)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마누라 운전 가르치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혹자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거라고도 한다. 그러나 예로부터 동양에선 아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처신하는 거라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동양 3국 국민들이 선호하는 4자 성어는 각각 다르다. 그중에서도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것이 바로 ‘난득호도(難得糊塗)’다. 그들은 글씨나 그림은 물론 각종 공예품, 심지어 월병 이름에도 이 글씨를 써넣고 있으며, 집집마다 이를 새긴 액자를 걸어두고 있다. 도가의 영향을 받아 중국인들의 처세술의 기본은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바보인 척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돋보이게 하려 하기 보다는 타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때로는 광채를 숨기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역발상의 처세술이 아닐 수 없다. 과거 1980년대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ㆍ개방정책을 추진하면서 내걸었던 ‘도광양회(韜光養晦)’도 같은 맥락이다. 힘을 기를 때까진 몸을 낮추고 강대국들과 전술적으로 협력하는 외교노선이다. 이 말은 원래 〈삼국지연의〉에서 조조의 식객으로 있던 유비가 자신의 재능을 숨기고 은밀히 힘을 기른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난득호도란 말은 원래 청나라 중엽을 살았던 8명의 괴짜 문인화가 중 으뜸으로 꼽히는   정판교(1693~1765)의 일화에서 유래한다. 그는 어느 날, 시간이 너무 늦어 산중에 있는 집에 신세를 지게 되는데 이 주인집 노인과 글귀를 주고받게 된다. 원래 문장은 “총명하기도 어렵고(총명난·聰明難), 멍청하기도 어렵다(호도난·糊塗難). 총명한 사람이 멍청하게 처신하는 것은 더 어렵다(유총명전입호도경난·由聰明轉入糊塗更難)”이다. 한마디로 진짜 고수는 어리숙해 보인다는 거다. 포커판에서도 하수는 자신의 패가 좋게 뜨면 얼굴에 화색이 돌지만 고수, 소위 포커페이스는 전혀 내색이 없는 법이다. 사실 우리 주위엔 헛똑똑한 사람들이 넘쳐난다. 중국인들이 사석에서 하는 말을 들어보면 가장 상대하기 쉬운 사람들이 한국인들이라고 한다. 성질도 급한 데다 자기 패를 미리 다 보이는 것은 물론 다른 경쟁 한국인들을 비난하고 무시하기 때문에 자신들은 그냥 웃으며 기다리기만 하면 가격도 다 알아서 깎아주고 거래조건도 유리하게 제시한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난득호도를 익혀온 그들과의 협상에서 백전백패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방면의 최고수를 꼽으라면 바로 시진핑 주석이다. 그는 엄청난 경쟁자 속에 부드럽고 온화하며 어떻게 보면 약간 모자란듯한 이미지를 유지해온 결과, 강력한 라이벌 구도 속에서 어부지리로 권력을 움켜쥐게 된다. 그러나 그 이후 시진핑의 행보는 역대 그 누구도 해보지 못한 수만 명에 달하는 부패한 공산당 권력자들을 처단하는 엄청난 개혁을 진행하고 있다.

비슷한 말 중에 ‘대지약우(大智若愚)’가 있다, 즉, 지혜가 많은 사람은 바보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최고의 경지는 일찍이 노자가 말한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수준일 것이다. 큰 솜씨는 오히려 서툴게 보인다는 뜻이다. 사실 피카소 그림은 어찌 보면 어린아이가 낙서한 것 같이 보인다. 진정한 프로의 세계에서 대교약졸은 한마디로 감춤의 정신이자 조용한 배려이자 절제다. 비슷한 맥락에서 노자는 “완전히 이룬 것은 오히려 모자란 듯하고, 완전히 가득 찬 것은 빈 듯하며, 완전한 웅변은 눌변처럼 보인다”고 설파하였다.
고대 병법에도 이러한 내용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유명한 삼십육계 중에서 제27계 ‘가치부전(假痴不癲)’을 꼽을 수 있다. 즉, 바보인 척하되 미친 척하지는 말라는 뜻이다. 이것은 속임수를 동원해 상대의 경계심을 늦추고 결정적인 시기에 국면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계책이다. 삼국시대 당시 위나라 권신 사마의(司馬懿)가 행한 가치부전의 일화는 지금까지 전해져오고 있다.

서양에도 비슷한 경구는 존재한다. 생전에 스티브 잡스가 강조하던 말 중에 ‘Stay foolish!’가 있다. 이는 그가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행한 그 유명한 연설 중에 사용하면서 세간에 회자된 말이다. 그렇게 보면 동양이나 서양이나 최고수의 경지에 이르면 결국 같은 것을 보게 되는 모양이다.  치열한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역시 고수의 원리는 같다. 수많은 기능을 주렁주렁 매단 제품보다는 단순함으로 승화시킨 제품에 고객은 열광한다. 아이팟, 아이패드, 아이폰 시리즈가 보여주는 단순함(simplicity)의 경지가 바로 그것이다. 구글이 펼치는 세계를 들여다보면 구글은 그들이 가진 최고급 기술은 오히려 감추고 숨긴다. 이로써 고객에게 구글의 서비스는 ‘단순하고 편리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이다. 이 회사에 근무하는 직원들조차 구글처럼 복잡한 기업이 너무나도 단순해 보이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라고 말한다. 구글이야말로 서양판 대교약졸의 대가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세계 유수의 첨단기업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뛰어난 기술력을 결코 내세우거나 과시하려 하는 대신 고객의 경험에 호소하는 철학을 갖고 있다. 결국 고수는 숨기고 하수는 드러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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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경제도 어렵고 세상도 어지러운 때가 되면 집안에 진짜 어른이 한 분이라도 계셨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의 깊고 인자한 얼굴이 떠오르는 건 비단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분이 평소에 하시던 말씀 중에 “나는 바보다”라고 하신 걸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다. 이제 보니 추기경의 수준은 노자와 닿아있었던 것이다.

한해가 또 덧없이 저물어가고 있다. 정신없이 흘러만 가는 우리네 인생에서 잠시 생각해본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 가치 있는 삶일까?
여기에 대한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이다. “당신이 이 세상에 올 때 당신만 울고 모든 사람이 웃었다. 이 세상을 떠날 땐 그 정반대로 당신은 웃고 모든 사람이 우는 인생을 살아라!”


이동규
이동규

국내 대기업과 공공기관의 경영·정책자문교수, 기획예산처 정책자문위원, 행자부 정부혁신관리위원(대통령 표창), 대통령직속 지역발전위원회 평가위원을 거쳐 기획재정부 공공기관  정부경영평가단 팀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경희대 경영대학원 창조경영MBA 주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생산관리학회 부회장, 품질경영학회, 서비스경영학회 이사를 맡고 있다.
기타 행정자치부 정책자문위원(창조정부 3.0), 코레일 경영자문단 위원장, 금융소비자원  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저서인 『한국인의 경영코드』(21세기북스) 외 품질경영과 서비스 분야에 관한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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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5.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