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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예술천당 불감지옥(?)

김정수 (한양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 예술천당 불감지옥(?)


“예수천당, 불신지옥!”
종교가 있건 없건 아마 누구나 한두 번은 들어봤을 구호이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번잡한 도심 한복판에서 이런 구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전단을 나눠주는 전도자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 주변을 보면 왜 이리 소란스럽게 떠드느냐며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고, 마치 서커스단의 광대를 보듯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미친 X라고 욕을 퍼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간혹 손에 쥐여주는 전도지를 받아 찬찬히 읽어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그저 무심히 스쳐 지나가 버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사람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전도자는 계속해서 외쳐댄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필자는 지금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노방 전도자에 관한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필자의 눈에 열정적인 ‘전도자’와 열정적인 ‘예술가’가 일면 너무나 유사하게 오버래핑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 많은 길거리에서 남들이 욕하건 말건 구호를 외쳐대는 전도자와 불멸의 예술혼을 불태우며 창작에 고심하는 예술가를 같은 부류로 취급하는 것은 천만부당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소중하다고 믿는 것에 대한 절대 확신 그리고 더 나아가 그 확신을 모든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다.

사실 예술과 종교는 아주 오래전부터 서로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여 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수많은 예술적 대작들이 종교를 위해 혹은 종교를 품고 제작되었다. 세계 어느 나라건 종교는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그 사회의 문화 속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녹아들어 갔다. 그리고 종교가 국가의 통치이념으로서 패권적 지위를 누리던 옛날에는 정치도 종교에 복속되었고 예술 또한 종교에 수종 들면서 연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몇몇 종교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정교분리 원칙을 수용하게 되면서 종교는 과거의 제왕적 지위를 잃어버렸다. 그 결과 과거 종교가 누리던 신성한 영적 권위는 소멸해버리고 합리성과 물질주의가 현대사회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은 영적 동물이어서 그런지 물질만으로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갈급함이 있게 마련이다. 현대사회에서 종교가 내어준 그 빈자리를 차지한 것이 바로 예술이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네덜란드의 화가이자 경제학자인 한스 애빙(Hans Abbing)은 “예술은 종교의 현대적 모습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 말은 오늘날 예술의 사회적 지위와 권위의 근원이 무엇인지 그 핵심을 간파한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예술은 그 자체로 인간의 물리적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아니다. 하지만 합리성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예술은 일상생활의 공허를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피곤한 일상에 찌든 사람들에게 예술은, 마치 종교와도 같이, 물질적 범속함을 초월하는 피안의 세계를 약속한다. 마치 천당 혹은 내세를 기원하는 종교처럼 예술은 우리를 일상 너머 또 다른 세상을 맛보게 하려 한다.

현대 사회에서 예술은 그 이름만으로도 무언가 형용하기 어려운 권위를 가지고 있다. 예술은 여느 세상만사와는 차원이 다른,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성역처럼 여겨지는 듯하다. 오늘날과 같은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예술가’라는 명칭에는 신비로운 아우라가 동반된다. 예술가에게는 마치 신의 계시를 전하는 예언자와도 같은 비범한 포스가 느껴지는 것만 같다. 예술의 이러한 독특한 권위를 애빙은 “신성함(sacredness)”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예술의 신성함’에 대한 예술가들의 확고한 믿음은 각종 사례를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나라 예술지원정책의 주무기관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사명 선언문을 들 수 있다. 홈페이지에 게시된 소개 글을 보면 예술위원회는 “훌륭한 예술이 우리 모두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설립되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국민 모두가 문화예술이 주는 창조적 기쁨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필자 강조) 다시 말해서, 예술이란 천상의 기쁨과도 같은 것이므로 모든 국민들이 이 좋은 예술의 행복을 다 같이 누리도록 해야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중생을 널리 구제하고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는 종교적 사명감과 다를 바가 없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굳은 신념으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전도자의 모습이 연상된다.

‘예술의 신성함’에 대한 믿음은 곧 ‘국가는 반드시 예술을 지원해야 한다’는 당위론으로 이어진다. 정부의 예술지원 책임에 대한 예술가들의 인식은 문화부가 3년마다 정기적으로 조사하는 『문화예술인실태조사』를 통해 엿볼 수 있다. 1997년과 2000년의 조사항목에는 “예술인과 예술활동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이에 대해 당시 조사대상자 중 약 90%가 ‘부족하다’고 응답하였다. 또한 문화예술의 진흥을 위한 시급한 과제로는 ‘문화예술 창작활동의 지원’을 1위, ‘문화예술단체에 대한 지원’을 2위로 꼽았다. 그리고 예술창작활동에 대한 장애요인 1위로 꼽힌 것도 ‘지원 미비’였다. 이후 시행된 모든 실태조사에서 예술가들은 정부가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할 정책 1위로 항상 ‘예술가·단체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꼽고 있다. 정부의 문화예술정책에 대해 만족한다는 응답은 10%를 넘은 적이 없다. 특히 ‘예술인 및 예술활동 지원’에 대해서는 ‘불만족스럽다’는 응답이 거의 90%나 되는 반면 ‘만족스럽다’는 고작 3%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러한 조사를 통해 드러나는 예술가들의 생각을 요약하면 “예술 진흥을 위해 정부가 책임져야 할 지원이 너무 미비하여 창작활동도 힘들고 불만이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인 자료를 검토해보면 문화예술에 대한 정부지원은 그동안 매우 큰 폭으로 확대되어 온 것으로 확인된다. 예컨대 문화부의 예산 규모는 1980년 301억 원에서 2000년에는 1조 1,707억 원으로, 그리고 2014년에는 4조 4,224억 원으로 대폭 증가하였다. 정부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1980년 0.47%에서 2014년 1.24%로 크게 증가하였다. 또한 문화부 예산 중 문화예술 지원을 위한 예산만 보더라도 1980년 146억 원에서 1990년에는 854억 원, 2000년에는 9,639억 원, 그리고 2014년에는 1조 8,782억 원으로 크게 증가해온 것이 사실이다. 2014년 정부 총예산이 1980년에 비해 약 60배 늘어난 반면 같은 기간 문화예술 예산은 무려 130배 가까이 커졌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문화융성을 국정 기조로 내세운 박근혜 정부는 문화재정을 2%로까지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열심히 추진하고 있다. 이처럼 정부의 예술지원에 관한 한 예술가들의 인식과 실제 현실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는 것이다.

『문화예술인실태조사』에서 각별히 눈여겨볼 만한 조사항목이 또 하나 있다. “문화예술적 가치와 사회적 책임이 상충할 때,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는가?”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문화예술적 가치’를 우선시하겠다는 응답은 50%가 넘는 반면 ‘사회적 책임’을 우선시하겠다는 응답은 그 절반밖에 되지 않는 25% 수준에 불과하였다. 정부를 상대로 자신의 창작활동을 위한 지원을 요구하면서도 사회적 가치보다는 예술적 가치를 더 우선시하겠다는 것은 사실 모순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정부의 예산지원은 결국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되는 공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누구의 후원도 받지 않고 순전히 자력으로 창작활동을 한다면 어떤 가치를 우선시하건 그것은 예술가 본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이다. 여기에는 그 누구의 간섭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국가로부터 공금을 지원받으려고 한다면 마땅히 그에 따르는 공공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실 문화정책의 핵심이념으로 종종 인용되는 소위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 지원은 받되 간섭은 받지 않겠다는 것은 공공책임성(Public Accountability)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적 자금을 받아 쓰면서 공적 책무는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유아적 발상 아니면 특권적 발상 둘 중 하나이다. (필자가 보기에 현실은 전자보다 후자라고 생각된다.)

예술위원회의 사명 선언문이나 정부지원에 관한 예술가들의 설문결과는 우리 사회에도, 적어도 예술가 커뮤니티 내에서는, ‘예술의 신성함’에 대한 믿음이 대단히 뿌리 깊게 박혀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마치 종교적 신앙심과도 같이 타협이 불가능할 정도로 견고한 듯하다. 이들에게 있어서 예술은 그 자체로 지고의 가치가 있다. 예술이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니까 중요하다는 식의 수단적 가치를 운운하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처럼 들리기도 한다. 예술은 원래 신성한 존재이고 인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무조건 예술을 지원해야 하며, 지원은 하되 감히 예술가에게 이래라저래라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학에 몸담고 있는 필자로서는 교육부를 향해 한번 해보고 싶은, 그러나 절대 입 밖으로 내어서는 안 될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술의 신성함’은 사실 만고불변의 절대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일종의 신화와도 같은 관념에 불과하다. 단군신화를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고 살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거짓된 허상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따질 생각도 없이 그냥 무관심하게들 살아간다. 마치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노방 전도자를 그냥 스쳐 지나가는 대부분의 행인들처럼 말이다. 전도자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진리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단지 신화 같은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다. 예술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전도자가 예술가와 다른 중요한 차이점 하나를 지적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길거리의 노방 전도자는 정부에게 포교활동을 위한 재정지원을 요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국가의 공금을 쓰지 않으니 어디를 돌아다니건 무슨 말을 하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 그런데 만약 전도자가 행인의 손에 전단지를 쥐여주면서 그 사람의 주머니에 슬쩍 손을 넣고 돈을 빼가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기꺼이 헌금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 아닌 다음에는 당장 도둑놈이라고 화를 낼 것이다.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한 공금은 정부가 국민들의 호주머니에서 꺼내 간 돈이다. 예술에 대한 정부지원을 늘린다는 것은 곧 국민들로부터 거둬가는 세금이 더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가들은 ‘예술의 신성함’에 대한 종교적 확신과 열정이 있겠지만 사실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 정도로 신실한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예술진흥을 위한 정부지원을 당장 축소하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모든 국민들에게 ‘예술의 신성함’을 전도하려면 국민들이 확실히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벅찬 예술적 감동을 직접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방 전도자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듯이, 포교는 그저 구호만 외치는 정도로는 잘 되지 않는다. 그 이상의 절실한 노력이 필요할 터인데,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는 예술가들 스스로 고민해보아야 할 숙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藝術天堂, 不感地獄!” 믿숩니까~?



김정수
김정수

고려대 법과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Yale University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고려대 공공행정학부에 재직하였으며 현재는 한양대 정책과학대학 행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문화정책학회 창립이사, 한국정책학회 편집위원장, 문화체육관광부 자체평가위원, 공공기관 경영평가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주요 관심분야는 문화정책과 정책이론이다. 주요 저서로는 『문화행정론:이론적 기반과 정책적 과제』(학술원 우수도서 선정), 『스크린쿼터의 추억:한국영화 의무상영제도 변천사』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스크린쿼터와 딴따라:대중문화에 대한 정부개입과 문화산업경쟁력에 관한 시론」, 「미녀와 야수:문화행정의 새로운 패러다임 모색」, 「불확실성, 결정오차, 그리고 제비뽑기의 역설:문예진흥기금 지원심의방식에 대한 역발상」, 「문화생산의 글로벌화에 따른 새로운 문화정책 패러다임의 모색:우리나라 영화산업의 사례를 중심으로」, 「(신)한류에서 배우는 문화정책의 교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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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6.01.04]